「미레에게」, 윤재
노포를 좋아하는 우리는 을지로나 종로의 낡은 가게에서 자주 만난다. 테이블이 끈적거리거나 벽의 페인트가 벗겨져 있어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소주를 마셔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끝내주는 안주만 있으면 그만이다. 어쩌다 한 번, 요즘 말로 ‘감도 높은’ 가게에 간 적이 있다. 그날은 평소보다 말수가 적었고, 공기가 묘하게 어색했다. 나는 결국 못 견디고 입을 열었다.
“얘들아… 2차는 계단집 갈까?”
계단집은 서촌에 있는 유명 해산물 노포다. 초록색 분식집 접시에 소라찜이 가득 담겨 나왔다. 감도 높은 가게에서는 그 누구도 음식 사진을 찍지 않았다. 그런데 그 소라찜을 보자마자 너나 할 것 없이 “이거지예” 하면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우리는 각자 따로 알던 사이였고, 윤지의 제안으로 처음 네 사람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날도 역시 낡은 술집이었다. 그 술집은 내 단골집이기도 했다. 인당 2만 원만 내면 안주가 끊임없이 나오는 곳으로, 술이 술을 부르는 가게다. 우리는 벌컥벌컥 소주를 들이켰다. 사장님과 안부를 주고받다가, 그는 내게 이 친구들은 어떤 친구들이냐고 물었다.
“아 사장님, 저 사실 레즈비언인데요. 이 친구들도 레즈비언이라 저희 모임 만들었어요!”라고 대답했다. 사장님은 갑자기 눈빛이 회까닥 하더니 레즈비언들은 다 미쳤다고 했다. 그러더니 한 연예인이 레즈비언들과 친해서 자살을 한 거라며 “미친 레즈비언들…”이라고 덧붙였다. 기분이 나빴어야 하는 일인데, 술에 너무 절여져서 ‘미친 레즈비언’이라는 단어에만 꽂혀서 웃기만 했다. 다음날 술이 깨서는 그 새끼 완전 미친놈이라고, 다시는 가지 말자고 하면서도 우리 앞으로 모임 이름을 ‘미레’로 정하자고 얘기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술자리 말고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중에서도 모두가 좋아하는 건 물놀이다. 처음 함께 수영을 한 곳은 인천의 한 호텔 수영장이었다. 다른 여자들은 비키니를 입고 머리를 적시지 않으려 애썼고, 그들의 남자친구는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수경을 쓰고 잠수 대결을 하거나, 첨벙첨벙 물을 튀기며 놀았다. 그 수영장에서 우리만 물미역처럼 젖어 있었다. 나는 그날 해방감 같은 것을 느꼈다. 체면을 챙기기보다 재밌고 즐거운 것이 더 중요한 사람들. 이 친구들은 나를 재단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를 모아준 윤지는 캐릭터 ‘몬치치’를 좋아한다. 머리 숱이 많아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북실머리 캐릭터가 떠오른다. 본인과 닮은 캐릭터를 좋아한다는 점에서 귀여운 아이다. 윤지와 그녀의 여자친구는 백패킹을 좋아해서 결혼식을 잼버리로 하고 싶어 한다. 나는 극구 사절하며 글램핑으로 부탁한다고 매번 간곡히 요청한다.
그런 윤지와 티격태격하고 있으면 혜은이가 “아오, 쟤네 또 싸운다.”라고 말한다. 혜은이는 우리 중 가장 어른 같고 차분하다. 혜은은 나보다 한 살이 어린데도, 나보다 훨씬 어른처럼 느껴진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맞는 말’을 많이 한다. ‘맞는 말’은 종종 잔소리로 들리기 마련인데, 혜은이 하는 말은 다 수용하게 된다.
이 상황을 그저 지켜보며 피식피식 웃기만 하는 사람이 있다. 갸루 같은 화장을 하고선 과묵한 여진이다. 얘는 사람에게 한없이 차가우면서, 강아지에게는 따뜻하다 못해 뜨거울 지경이다. 매번 심드렁하게 관심 없는 듯이 있으면서도, 스쳐 지나가듯이 좋아한다고 말했던 브랜드의 컵을 생일 선물로 사준다. 편지도 그냥 쓰지 않는다. 각자 좋아할 것 같은 그림이나 캐릭터 편지지 위에 또박또박 쓴 글씨로 전해준다.
미레에게 올해 내 생일에는 수필 합평 모임 참가비를 선물로 받고 싶다고 했다.
[얘들아 나 생일선물 받고 싶은 거 말해도 돼? 나 글쓰기 모임 하게 돈 내주라]
[에 특이하시다]
[그니까 특이하시다;]
하지만 그 반응과는 달리 1분도 안 돼서 모두 참가비를 입금해 줬다. 말은 틱틱해도 행동만큼은 빠르고 따뜻하다. 모임에 절대 빠지지 말고 열심히 참여하라며 엄마 말투로 이야기했다. 나는 돈을 받자마자 신청을 하고 “얘들아, 이번 수필 모임에서는 너네 이야기를 꼭 쓸게”라고 했다. 윤지는 써주면 10번 읽을 거고, 안 쓰면 돈을 다시 뺏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약속한 그 글을 쓰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대놓고 지지하지는 않는다. 오글거리는 말로 사랑 표현을 하는 일도 거의 없다. 1년에 한 번, 생일 축하 편지에서나 읽어 볼 수 있다. 대신 가장 필요할 때 서로를 찾는다. 모두 직장인이 된 지금은 전보다 자주 보지는 못한다. 하지만 멀어졌다고 느껴본 적은 없다.
나는 보통 급하게 친해진 사이는 금방 체해서 식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는 반대로, 시간을 들여 천천히 가까워졌다. 뜨겁지도, 그렇다고 식지도 않게,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며. 그래서 내가 ‘미레’를 다시 정의해보려고 한다. ‘미친 레즈비언’은 갖다 버리고, ‘미지근한 레즈비언’으로.
「미레에게」
- 발행일 2026년 5월 11일
- 글쓴이 윤재 writer-yoonjae.com @yoonjaethings
- 작은배가 진행하는 <일상묘사 : 수필 합평 모임>에서 탄생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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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F 파일을 A4 용지에 출력한 후 8페이지 Zine 만드는 법에 따라 자르고 접으면, 글이 담긴 Zine을 만들 수 있습니다.
· 「집에 가는 길」, 고구말랭이
· 「어떻게 낳을 것인가」, 고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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