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방구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호연지

「사랑과 방구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호연지

나는 삼십 대 중반의 여성 김영선과 2041일째 사귀고 있다. 나보다 두 살 연상인데, 좀 귀염 상인데다가 행동도 어른스럽지 않아서 언니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2019년 겨울, 우리는 우도의 한 카페에서 처음 만났다. 나는 이제 막 일하러 온 신입 직원이었고, 영선은 그 카페의 부점장이었다. 아홉 명의 직원 중 두 번째로 짱이었으니, 꽤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녀는 어딘가 헐렁했다. 첫눈에 봐도 그랬다. 반쯤 풀린 신발 끈과 몸집에 비해 지나치게 커다란 패딩, 진한 데 없는 맹한 이목구비와 투명 뿔테 안경. 뽀얀 피부. 그리고 쓴 건지 쓰다 만 건지 모르겠는 머리 위에 살포시 얹은 모자까지. 부점장의 위엄 따윈 없어 보였다.

직원들과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신입 교육을 맡은 영선이 카페 구석구석을 소개하며 앞으로 내가 맡게 될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나는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영선의 쇄골에 시선을 뺏겨 집중이 안됐다. 그녀는 커다랗고 두꺼운 패딩 안에 반팔티를 한 장 입고 있었는데, 목 부분이 다 늘어져 쇄골 한쪽이 드러나 있었다. 패딩을 벗으니까 그게 다 보였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잠옷을.. 입고 나온건가..’ 생각하며 살짝 민망한 기분으로 쇄골을 보지 않으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이제 문이랑 양말 보러 갈 거에여” 어느 정도 교육을 마친 영선이 내게 말했다. 뭔 소리지.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한 내가 “네?” 하고 되묻자, 영선은 “무늬랑 양말이요.”라고 다시 말했다. 두 번 들어도 무슨 뜻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계속 물어보면 사오정 같을까 봐 일단 알겠다고 했다. 문이랑 양말인지 무늬랑 양말인지 그게 도대체 뭘지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영선이 데려간 곳에는 고양이가 두 마리 있었다. 문희와 양말이. 남자 직원 기숙사에서 얹혀사는 고양이들이었다. 그제야 머릿속의 퍼즐들이 맞춰졌지만, 여전히 의아했다. 왜 보여 주는 거지? 뽐내는 건가? 심지어 거긴 내가 살게 될 기숙사도, 영선이 살던 기숙사도 아니었다. 물음표 가득한 내 표정을 눈치챈 영선이 말했다. “아, 여기는 지금 남자애들이 사는 덴데 내가 원래 여기서 살았었거든요. 지금은 쩌 아래로 옮겼어요.” 그렇구나. 그 말을 듣고도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해 고개만 끄덕였다.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어색한 정적 속에 고양이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쭈그려 앉아 문희와 양말이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웠다.

“고양이 키운다면서요. 자기소개서에 써있던데.” 아뿔싸. 영선이 내 자기소개서를 읽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비밀을 들킨 것도 아닌데 괜히 부끄러워져 귀까지 달아올랐다. 난 부끄러우면 귀가 빨개진다. 그 마음을 숨기려 고개를 푹 숙이고 빨개진 귀를 만지작거리는데, 영선의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컨버스 하이를 구겨 신은 데다, 신발 끈까지 풀려 있었다. “아.. 네.. 고양이 키웁니다. 그런데 부점장님 신발 끈 풀리셨어요.” 그녀는 신발을 힐끗 보더니 괜찮다며 고양이 얘기를 이어갔다. 왜 다시 안 묶는 거지. 어떻게 저게 괜찮지. 나는 신발 끈이 풀린 걸 잘 못 본다. 영선이 뭐라고 계속 말하고 있었지만, 질질 풀린 끈이 거슬려서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결국 못 참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신발 끈을 대신 묶어 드려도 될까요..?” 영선은 입술을 삐죽이며 그러라고 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풀린 끈을 단단하게 묶었다. 그녀는 내 머리 꼭대기를 내려다보며 신발 끈을 이렇게 세게 묶은 건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의 나는 5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민간인이 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각 잡힌 인간이었다. 위계질서가 확실한 곳에서 권위적인 상사들에게 복종하며 일해왔기 때문에 저렇게 대충이고 엉성한 김영선 부점장님이 이상하면서도 어쩐지 계속 신경 쓰였다.

신경 쓰여서 자꾸 봤다. 자꾸 보니까 의외의 모습들이 보였다. 헐렁하게만 보였던 영선은 일할 때만큼은 확실한 사람이었다. 눈앞의 주문이 밀려도 당황하지 않았고, 기계가 말썽을 부리면 빠르게 다른 방안을 생각해 냈다. 목이 축 늘어진 티셔츠를 입은 사람에게서 저런 침착함이 나올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손님을 대할 때도 대체로 친절했지만, 그 친절함이 과하지 않았고, 가끔 상식 밖의 손님이 나타날 때면 먼저 나서서 단호하게 대처했다. 이 모든 걸 신발을 대충 구겨 신고 머리에 모자를 삐뚤게 얹은 채로 해냈다.

무엇보다도 의외였던 건 그녀에게 남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걸 알았을 때 왠지 모르게 실망스러웠던 기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이럴거면 고양이를 보여주지나 말지. 나는 설렜었는데.

영선은 짜증 나게 다정했다. 짜증 나게 자꾸만 내 방에 놀러 왔다. 내 옆에서 쪼잘 쪼잘 떠들어댈 때면 짜증 나게 웃겼고, 생긴 건 또 짜증 나게 귀여웠다. 남자친구가 있는 여자를 좋아하게 되는 건 정말 짜증 나는 일이다. 제일 짜증 나는 건 김영선은 아무렇지도 않게 나에게 본인만의 우정을 퍼부어댔다는 거다. 남자친구랑 데이트는 안 하고 맨날 나랑 놀았다. 남자친구가 바빠서 원래 잘 안만난댔다. 대타가 된 것 같아 마음이 꽁해지기도 했지만, 막상 그녀를 만나면 꼼짝없이 웃고 말았다. 우리는 잠을 참아가며 새벽 네시까지 카톡을 주고 받았고, 몰래 기숙사에서 빠져나와 둘이서만 해 뜨는 걸 보러 가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하는 건 우정이 아니었다. 난 친구랑 이런 거 안 한다.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부점장님은 나를 뭐로 생각하는 걸까. 그냥 아끼는 부하 직원인가. 딱 친구 정돈가. 쟤는 친구랑 원래 저러나. 남자친구도 있으면서 저래도 되나. 미친 거 아닌가. 어느 날 밤에는 이런 생각에 그녀가 미워지기도 했다가, 다음 날 얼굴을 보면 그냥 좋기만 했다가, 이랬다가 저랬다가… 미친 건 나였다. 오 분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애타는 마음과 내 눈에서 영원히 안 보였으면 하는 마음이 뒤엉켜 나를 괴롭혔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나날들을 보내던 어느 날, 김영선이 남자친구에게 차이고 왔다. 차일만 했다. ㅋㅋ. 삐질삐질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고 애써 그녀를 위로했다. 하지만 영선도 딱히 슬퍼하거나 아쉬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이쯤 되면 그때 사귀었던 남자친구는 나에게 반전 이미지를 주기 위한 가상의 인간이었던 것은 아닐지 합리적인 의심을 해보게 된다. 그날부터 나는 작전에 들어갔다. 이미 충분히 가까워지긴 했지만, 영선은 여자와 사귀어 본 적이 없으니 너무 들이대면 도망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좋아하는 마음을 눌러가며 적당히 밀고 당겼다.

영선은 나와 달랐다. 그녀의 이별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페 직원들은 베트남으로 워크숍을 떠나게 되었는데, 내가 입사하기 전부터 계획되어 있던 여행이라 나는 함께 갈 수 없었다. 5박 6일의 일정 동안, 영선은 틈만 나면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자기 하루를 생중계하듯 어딜 갔는지, 뭘 먹었는지, 뭘 샀는지를 알려줬다. 내가 없으니까 하나도 재미가 없다며, 나중에 꼭 둘이서만 같이 오자고도 했다. 좋아하는 티를 너무 내서 오히려 내가 더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어떻게든 마음을 숨기며 그녀를 애타게 하려 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영선은 단순하고 명료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내가 여자라는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의 솔직하고 주저 없는 모습에, 나는 더 이상 마음을 숨기지 않기로 결심했다.

영선에게 고백한 날의 기억을 흐릿하게만 기억한다.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못 하겠어서 술의 힘을 빌렸기 때문이다. 취해서 고백하는 건 진짜 멋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내가 될 줄은 몰랐다. 우리는 술에 취해 손을 잡고 마을 길을 걸었다. 우도 하늘엔 별이 참 많다는 얘길 했던 것 같다. 나는 오랫동안 연습했던 ‘좋아해.’ 라는 말을 할 타이밍을 재느라 그 아름다운 별을 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조잘조잘 움직이는 영선의 입술이 보였다. 그녀의 말을 끊고, 키스해도 되냐고 물었다. 알코올의 힘은 대단하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밤이었다.

그 후로 2041일이 지났다.
요새는 선선해져서 저녁에 걸으면 기분이 좋다.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마시며 걷고 있는데 영선이 갑자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엑 뭐야 느끼해.”
눈썹을 찌푸리며 영선을 쳐다보니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영선은 이렇게 느끼한 행동들을 하고 내가 괴로워하는 걸 즐긴다. 질 수 없어서 “우리 누가 누가 더 느끼한가 대결하자” 고 제안했다. 내 말에 그녀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인터넷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 지을듯한 표정을 짓고 검지와 중지를 겹쳐 내 볼을 톡 하고 치며 말했다. “장난꾸러기” 진짜 느끼하고 재수 없었다. 어떻게 저런 걸 1초만에 생각하지. 난 정말 김영선이 세상에서 제일 웃기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코를 톡 쳐줬다. 영선은 느끼함에 몸부림치며 깔깔깔 웃다가 방구를 북! 하고 뀌었다. 민망해할 법도 한데 영선은 당당하게 말했다. “원래 사랑과 방구는 예고없이 찾아오는 거야.” 영선은 어쩌다 한 번씩 저렇게 정답같은 문장을 내뱉어 예고없이 나를 놀라게 한다. 방구 같은 인간. 우리는 사랑과 방구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걷고 또 걸었다.


「사랑과 방구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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