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싶은 도시 1
<나는 어디에 살고 싶은가?> 1편
전주에서 태어나 하이안, 상해, 하얼빈, 스테이트칼리지, 보스턴, 세인트폴, 서울, 제주까지. 많은 도시를 떠돌아다녔다. 이제는 정착하고 싶을 만도 한데, 나에게 더 잘 맞는 환경을 찾아 훨훨 떠나고 싶다는 충동이 나를 사로잡을 때가 있다.
서울을 떠나서 제주로 넘어올 때는 인터넷만 있다면 어디든 좋다는 생각을 했다. 온라인에서 공부하고 창작하고 여가를 보내는 나에게 서울 강남이나 제주 이도동이나 뭐가 다르냐는 논리였다. 근데 제주에 살수록, 식당과 콘텐츠 회사를 운영할수록, 나라는 사람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알아갈수록 궁금해진다. 나는 대체 어디에 살아야 할까? 남들 다 좋다는 곳이 아니라 내 삶의 방식에 적합한 환경을 과연 내가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어디에 살아야 할까?’라는 거대한 질문에 백태클을 걸기 전, 내가 살고 싶은 도시의 특징을 상상하며 나열해 보고자 한다(이상적인 기준이기 때문에 모두 충족하는 완벽한 환경은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치안
보스턴 근교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주말이면 가끔 1시간 반 동안 버스를 타고 보스턴 시내로 놀러 갔다. 그날도 더벅머리를 다듬고자 보스턴에 있는 일본 미용실을 예약해 볼까 고민 중이었다. 그때 같은 집에서 사는 친구가 말했다.
“오늘 보스턴 마라톤 하는 날 아니야? 차 엄청 막힐껄.”
“오, 맞네"
그렇게 방 안에 앉아 노트북 화면을 보는데 보스턴 마라톤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는 뉴스가 보였다. 너무 놀라서 TV를 켰고, 범인을 잡고 있으니 외출하지 말라는 메시지와 함께 군용 헬기가 날아다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범인이 이 동네에 숨어 있으면 어떡하지. 무서운 마음을 안고 멍하니 화면만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미국에 살면서 치안의 중요성을 깨닫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 뉴욕에서 핸드폰을 살 때 칼을 든 강도가 가게에 있는 기계를 쓸어가는 일도 있었고, 대학 캠퍼스 주변에 총기 사건이 일어났으니 참고하라는 경고 문자를 받기도 했다.
100% 안전한 곳은 없겠지만, 나는 맘 편히 살고 싶다. 밖에서 총소리가 들리면 살기 좋은 동네가 될 수 없다.
보행자, 자전거 중심
Jane Jacobs의 <The Death and Life of Great American Cities>를 읽으며 나는 미국의 도시 구조를 한층 더 깊게 이해했다. '미국식 도시'의 문제점을 요약하자면: 자동차 중심 사회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교외(suburb)로 이사한 후 차를 타고 도시의 중심(downtown)으로 출퇴근한다. ➙ 대부분 차로 움직이다 보니 도시의 반경은 한없이 넓어진다. ➙ 교통체증이 심각하니 인도를 없애고 차도를 넓힌다. ➙ 인구 밀도가 줄어들면서 결국 차 없으면 도무지 살 수 없는 환경으로 고착화된다. ➙ 저녁만 되면 텅텅비는 다운타운은 낙후되고, 차를 사거나 유지할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극심한 불편함을 겪으며 살게 된다.
난 사람보다 차가 더 많이 보이는 도시가 싫다. 제주시에 살면서 인도 없이 차로 가득한 골목을 걷다 보면 자연스레 Jane Jacobs의 가르침이 떠오른다. 우리 부부는 차 없이 자전거를 타고 살다가 포기하고 모닝을 끌고 다닌다. 자전거 도로가 없는데 어떻게 자전거를 타고 다니겠는가. 인도에서 타고 다니면서 민폐를 끼치거나 차도에서 쉼 없이 빵빵 소리를 듣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닌 결과는 둘 중 하나였다.
수많은 차에 둘러싸여 있는 시간만큼 나를 답답하게 하는 건 없다. 하루는 깜빡이를 켜고 충분한 간격을 확인한 후 옆 차선으로 끼어들었는데, 그것이 그렇게 화가 났는지 한 아저씨가 차를 옆에 붙이고 창문을 내려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야! 창문 내려 이 새끼야!” “그냥 무시하자.” 아내에게 말하며 우회전하는데 정말 우울했다. 무엇이 그 아저씨를 화나게 했을까. 내가 창문을 내리고 얼굴을 보였더라면 어땠을까. 그래도 내 얼굴에 욕했으려나.
아직도 웬만하면 걷거나 버스를 타지만, 차 없으면 너무나 불편한 지역에 산다는 답답함은 가시지 않는다. 총선 기간에 후보자들이 사람이 아닌 차에 유세하는 걸 보고도 씁쓸함을 느꼈다. 제주에 산다고 하면 초록빛 자연을 거닐며 살 것 같지만 현실은 자동차 지옥이다.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것이 합리적인 도시에 살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
(2편에서 계속...)
⛴ 구독자님은 어디에 살고 싶으신가요?
오늘은 <나는 어디에 살고 싶은가?> 1편을 보내드렸습니다. 쓰다 보니 너무 길어져서 걱정될 정도로 거대한 질문이었는데요. 오랫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던 사람인지라 마음속에 쌓인 이야기가 정말 많았던 것 같습니다.
다음 레터에서 '내가 살고 싶은 도시의 특징'을 마무리하고 그다음 주부터 몇몇 도시를 선정해서 케이스 스터디를 해볼 계획입니다. 제 시선으로만 이 질문을 다루다 보니 구독자님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 궁금하네요. 언제든 방명록이나 답장으로 알려주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작은배 이모저모
- 5월 18일 토요일 제주시의 자랑 카페 단단에서 오랜만에 팝업 식당을 엽니다. 아직도 마음속에 불타고 있는 요리를 향한 사랑을 담아 샌드위치와 빵을 선보일 예정인데요. 제주에 계시고 시간이 되신다면 만나 뵙고 인사 나눌 수 있길 바랍니다. 개봉박두!
- 책 <죽을준비>(가제)의 목차를 다듬고 있습니다. 강단과 소신.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사람이 효율적으로 소통하며 협업할 수 있도록 시행착오를 거치는 중입니다.
- 창작하는 아침을 시작한 지 벌써 2주가 다 되었습니다. 이제 오전 6시 기상이 익숙해졌는데요. 하루가 길어지고 집중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소소한 습관이 가져오는 큰 변화를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은 창작하는 아침을 함께하는 동료분들을 위한 팟캐스트 미니 워크숍을 진행했는데요. 화상으로 만나 이야기 나눌 수 있다는 게 반갑고 즐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