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고 제주로 (2편)
나는 어떤 사람들과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안녕하세요, 치지레이지 소신입니다.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에도 마고의 글을 보내드립니다. 마고는 지난 목요일 마지막 출근을 하고 무사히 서울로 돌아갔습니다. 일주일을 함께 했을 뿐인데 빈자리가 무척 크게 느껴지네요. 마고의 진심이 가득 담긴 글을 읽으며 허한 마음을 달래봅니다..🙃
치지레이지 건너편에는 ‘추가네 추어탕’이라는 식당이 있다. 손님이 없을 때면 포스기 앞에 서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추가네 추어탕의 주황색 간판을 멍하니 쳐다본다. 그러다 문득 '미꾸라지 전문'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OO 전문'.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전문 음식점이 있던가. '흑돼지 전문'이랄지 '전복 요리 전문', '갈치 전문'. 무엇 전문이라는 식당을 제주에서만 해도 자주 만났다. 치지레이지는 '비건 샌드위치 전문'이라고 하는 게 맞을까? 만약 '전문'이라는 타이틀을 걸어야 한다면 말이다. 사장 부부가 고민할 일이겠지만.
치지레이지에서 일하는 김에 매주 한 편씩 발행하는 뉴스레터도 써보지 않겠냐고 은비가 제안했을 때 기쁘면서도 내심 두려웠다. 글, 그림, 음식 등 뭔가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만드는 일을 늘 좋아해 왔지만 그런 일을 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고, 이미 그들만의 이야기로 잘 소통하고 있는 치지레이지 블로그에 나라는 타인이 불쑥 지면을 차지한다는 게 어떨지 걱정되기도 했다.
그래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마음이 더 컸으므로 약간의 부담감은 감추고 너무 좋다고 답했다.
'우리 블로그 본 적 있어?'
은비가 물었을 때 뜨끔했다. 다 읽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실 꼬박꼬박 챙겨보지 못했으므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날 밤 잠든 은비 옆에서 글을 꼬박 다 읽었다. 내가 쓸 글이 블로그의 결과 어울려야 하기에 기존의 글을 꼼꼼하게 읽어 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전문가가 되고 싶은 백공'이라는 최근의 글이 기억난다. 나 역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고, 글을 읽어보라고 은비가 추천까지 해 주었기에, 무슨 해답이라도 담겨 있나 보다 하고 기대하며 읽었는데 내가 했던 고민을 은비도 여전히 하고 있노라는 글이었다.
마침 그 글을 읽었기 때문에 '전문'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미꾸라지 ‘전문’ 추가네 추어탕.
내가 다녔던 작은 스타트업에서는 전문성을 발휘해야 하는 일이 크게 없었다. 여러 작은 일을 규모에 맞게 백방으로 해 나가는 일에 '전문성'이라는 단어는 거추장스러운 표현이었다. 나 역시 전문성이라는 걸 크게 의식하지 않고 눈앞에 주어진 일을 하나씩 해 나가는 것에 집중했고 작은 성공의 순간을 마주할 때 큰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5년이란 시간을 지나며 회사가 점점 커지자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회사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에는 내가 작게 했던 모든 일을 그 일의 전문가들이 도맡아 담당하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모든 일을 해왔다 할지라도, 그 일을 '전문적으로' 할 자격이 나에게는 없다고 느꼈다.
그때부터 무언가 하나 나의 전문 분야를 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내가 담당하고 있던 일은 내가 전문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다.
퇴사를 앞두고 '전문성'에 대한 갈증이 커지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시험을 쳐서 자격증이 나오는 그런 직업이, 이제라도 어떤 일의 전문가가 되고자 하는 나에게 그나마 나은 대안이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 직업은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을 치면 '당신에게는 전문가 자격이 있습니다'하는 증명을 공인받을 수 있으니, 전문성에 목말라 있지만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모르는 내게 너무나 명확한 길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 역시 몇 년을 투자하고도 전문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리스크가 큰 일이었다. 내가 그 일을 하고 싶은지도 확신할 수 없는데 몇 년을 무작정 투자할 수는 없었다.
결국 '전문성을 갖고 싶다'는 고민은 '그만큼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가', '그만큼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 앞에 가로놓이게 되었다. 나는 전문가가 되고 싶지만 아무것의 전문가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럴 수도 없고. 그렇다면 중요한 건 '전문가가 될 수 있는지 아닌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 싶은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그 질문을 탐구해 나가다 보면 결국은 '어떻게 살고 싶은가' 라는 류의 질문을 가장 근본적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은비네서 며칠 지내며 전문성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내가 본 은비는 이미 자기 일의 전문가였다. 백공처럼 뭐 하나 못하는 것 없이 재주가 많기도 하지만, 한 분야의 전문가이기도 한, 그런 T자형 인재랄까.
은비가 이미 전문가라는 사실은 그녀가 요즘 쓰고 있는 작은 가게 사장님을 위한 소책자 원고를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치지레이지가 왜 이곳에 위치하고 있는지, 왜 빵을 직접 만들고 있는지, 왜 이 가격이며 왜 샌드위치인지, 왜 메뉴 구성과 재료는 이러한지, 왜 비건인지 등. 내가 '야 샌드위치 대박 맛있다~!' 정도의 단순한 감상으로 마주했던 치지레이지의 모든 것에는 모두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무엇 하나 우연히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은 없었다.
나는 소책자 원고를 읽으며 충격을 받았다. 원고는 '소책자'라는 단어가 어울릴 만한 짧은 분량의 글이었지만, 작은 가게 사장님을 위한 '전문 도서'라고 해도 좋을 만큼 구체적이고 꼭 필요한 내용이 군더더기 없이 담겨 있었다. 난 창업을 준비하는 예비 사장은 아니지만 내가 읽어도 매우 재미있고 흥미로운 글이었다.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면서도 글쓴이의 삶의 태도와 철학이 녹아나 있었기 때문에.
소책자에는 아래와 같은 질문이 나온다.
- 유난히 기억에 남는 칭찬이 있다면, 무엇에 대한 칭찬이었는가?
- 나는 일을 통해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싶을까?
- 어떤 일을 할 때 내 모습이 특별히 마음에 드는가?
- 내가 해결하고 싶은 세상의 문제는 무엇일까?
은비는 전문가가 되기 위한 선제적인 모든 질문들을 이미 스스로 묻고 있었다. 이런 질문을 던지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꾸준히 실행한 후라야만, 비로소 그 영역의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전문가라는 건 억지로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시간을 들여서 진심을 다하다 보면 얻게 되는 어떤 경지를 우리는 간단히 '전문'이라고 부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질문을 읽으며 은비가 전문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진심을 다해 끈질기게 해야만, 실패하고 부딪쳐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전문성'이므로, 그렇게 진심을 다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구나, 생각했다.
치지레이지가 만들어지기까지 던져졌고, 지금도 역시 던져지고 있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도 물으려 한다. 난 어떤 사람들과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나는 어떤 가치를 이 세계에 전하고 싶은지 말이다. 인생은 한 번뿐. 배부르고 등 따수운 삶이었노라고 기억되는 것도 괜찮은 삶일지 모르지만, 이보다는 좀 더 마음 한 켠이 몽글몽글 뜨거워지는, 후회가 없고 퍽 마음에 드노라고 기억되는 삶이라면 좋겠다.
+ 제주살이 감사 후기
- 이 지면을 빌려 제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게 해 준 은비&민석에게 감사합니다.
- 불편했을 텐데 같이 생활하며 멋진 삶을 공유해 줌에도 감사합니다.
- 한치회와 맛난 저녁밥, 각재기국을 먹여 주신 은비 부모님께 감사합니다. 언제나 건강하세요.
- 지나가는 나그네를 궁금해하며 치지레이지를 찾고 블로그 글을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댓글로 제게 용기와 응원을 보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 서툰 알바생에게도 친절한 미소를 보내주신 손님 여러분 감사합니다.
- 은비네 덕에 제주를 여행하며 작은 가게 사장님들을 많이 만나 뵐 수 있었는데 맛난 음식과 좋은 서비스, 거기 녹아든 멋진 삶의 이야기를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 평소보다 소스가 많이 뿌려진 샐러드, 두꺼운 토마토가 든 샌드위치도 맛나게 먹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