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판 변천사
손님은 메뉴판으로 음식을 처음 만난다.
손님은 메뉴판으로 음식을 처음 만난다. 맛을 보는 건 아니지만, 메뉴를 고르면서 맛과 포만감을 기대하고 상상한다. 메뉴가 몇 개인지, 사이드 메뉴는 있는지, 무슨 음료를 판매하는지. 메뉴판 구성에 따라 어떤 음식을 어떻게 먹을지에 대한 손님의 생각이 달라진다.
식당을 열기 전에는 메뉴판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다. 그저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대접하면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메뉴판은 가게의 정체성까지도 좌지우지한다. 개업 후 6개월 동안 10번 가까이 메뉴를 수정하면서 깨달은 사실이다.
필요에 따라 넣고 빼기
영업을 시작하고 첫 두 달 동안 필요에 의해 메뉴판을 수정하는 일이 잦았다. 손님이 원하는 메뉴를 만들어 넣거나, 원가율이 높은 메뉴를 없애는 식이었다. 손님의 반응을 살피고 매출을 분석하면서 부족한 점을 조금씩 채워나갔다.
| 5월 20일 : 샌드위치 2종, 샐러드, 피자, 감자튀김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음료는 '드립 커피'와 '콤부차'로 단출했다. 가게를 준비하면서 개발한 메뉴 중에 가장 자신 있는 음식을 엄선한 결과였다.
| 6월 3일 : 음료에 '우롱 오미자 아이스티'를 추가했다. 임산부, 어린이 손님이 방문했을 때 마음 놓고 마실 수 있는 음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 6월 17일 : '감자튀김'을 메뉴에서 뺐다. 너무 큰 튀김기를 구입한 탓에 식용유 원가 비중이 너무 컸고, 튀김 메뉴가 하나뿐이라 튀김기 사용 빈도가 낮아 팔수록 적자가 나는 상황이었다. 튀김기를 바꾸거나 메뉴를 수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원하는 것을 보여주기
꼭 필요한 메뉴만 남기고 난 후에는 우리가 하고 싶은 것에 집중했다. 오픈 초기에는 '치지레이지=건강한 음식'이라는 후기가 많았다. 감자튀김이 메뉴에서 사라지고 난 후 그런 느낌이 더 강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치지레이지는 클린하고 건강한 비건 음식이 아니라 든든하고 정크한 비건 음식을 추구한다.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메뉴가 필요했다.
| 6월 27일 : '비건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추가했다. 시그니처 디저트가 있었으면 했는데, 아이스크림만큼 모두가 좋아할 디저트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건강보다는 맛에 집중한 메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 7월 11일 : '매콤한 감자커리 샌드위치'를 추가했다. 강한 향신료 맛이 매력적인 메뉴다. 매콤한 샌드위치가 추가되면서 치지레이지가 보여주는 맛의 스펙트럼이 확 넓어졌다.
정체성 표현하기
치지레이지는 '비건 샌드위치 샵'이다. 하지만 치지레이지를 '브런치 식당'으로 소개하는 리뷰가 자주 보였다. 영업시간이 짧고 샌드위치가 아닌 다른 메뉴를 함께 판매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샐러드는 한 종류뿐인가요?' '음료가 이것뿐인가요?' 확실하지 못한 정체성 탓에 손님들도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비건 샌드위치 샵'이라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메뉴판만으로 치지레이지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를 위해서 맥도날드나 써브웨이 같은 패스트푸드 음식점을 참고했다.
| 10월 17일 : '소다'를 새롭게 추가하고 '감자튀김'을 부활시켰다. 샌드위치+감자튀김+소다만큼 클래식한 조합은 없다고 생각했다.
| 10월 24일 : 메뉴에서 '심플리 토마토 피자'를 없앴다. 피자를 없앤 이유는 여럿이지만, 샐러드나 피자가 아닌 샌드위치에 집중하고 싶은 욕심이 컸다.
| 11월 7일 : 사이드 메뉴로 '오늘의 스프'와 '칠리 프라이즈'를 새롭게 추가했다. 사이드 메뉴가 탄탄해지면서 '1인 세트 구성'도 마련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