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 밖의 사람들」, 호연지
나는 커피 가게 사장이다. 동업자 영선과 함께 아침부터 저녁까지 커피를 판다. 우리 가게는 제주 시내의 복잡한 뒷골목에 있다. 처음 가게를 구할 때는 조용한 동네에서 고상한 척하며 장사하고 싶었지만, 부동산 어플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곳의 빈티지한 인테리어와 저렴한 임대료에 눈이 돌아 덜컥 계약해 버렸다. 오래된 주택을 거의 손대지 않고 그대로 쓰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나서야 이 동네의 가게들이 눈에 들어왔다.
고려 컴퓨터 세탁, 삼성마트, 오렌지 호텔, 젤리, 현숙, 건전지, 배비장 모텔, 꿀벅지, 달소녀 주막…
아. 현란하고도 이상한 골목길이었다. 낮은 건물들 사이로 곳곳에 모텔과 단란주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이 동네에 커피 마실 곳은 양파라는 다방뿐이니 장사가 잘될 거라고 했던 건물주의 말을 들었을 때 눈치챘어야 했다. 단란주점뿐이었다면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화려한 간판들 사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끼어 있는 주택들이 왠지 더 별나 보였다. 이런 거리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그때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더 놀라운 점은, 이 골목에서 조금만 걸으면 초등학교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가게 앞 골목길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하루에도 수십 명이 지나다닌다. 출근하는 남자와, 군것질을 하는 꼬마와, 장을 보러 마트에 가는 술집 사장님과, 강아지 산책시키는 여자와, 담배를 피우는 할머니와, 학교 가는 학생들. 그들 중에는 우리 가게로 들어오는 사람도 있고, 들어오지 않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가게 안에서 커피를 팔며 그 사람들을 본다.
하루의 시작은 늘 구씨 아저씨와 함께다. 우리가 가게 문을 여는 오전 8시 30분이 되면, 저 멀리서부터 작은 하얀색 스쿠터 한 대가 털털거리며 굴러온다. 마트에서 일하는 구씨 아저씨의 스쿠터다. 그는 스쿠터에서 내리자마자 헬멧을 벗고 담배를 입에 문다. 사실 구씨 아저씨가 실제로 구씨인지는 모른다. 땀을 뻘뻘 흘려가며 성실하게 일하지만, 잘 웃지 않고, 말수도 없는 데다가, 퇴근할 때면 늘 소주가 들어있는 봉다리를 들고 가는 모습이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손석구가 맡은 구씨 역과 닮아 보여 우리가 마음대로 붙인 별명이다. 쉬는 시간마다 마트 앞에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나, 배달용 다마스를 거칠게 몰며 골목을 빠져나가는 뒷모습은 그야말로 구씨 그 자체다. 인사성이 밝은 나와 영선은 마트 직원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지만, 구씨 아저씨는 쉽지 않다. 인사를 해도 늘 뚱한 얼굴로 고개만 까딱할 뿐이다. 그러다 어쩌다 한 번씩 세심한 면모를 뽐내기도 한다. 계산할 때 뒷번호 네자리를 말하지 않아도 포인트를 알아서 쌓아준다던가, 마트에 없을 법한 물건을 찾을 때도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찾아내 주면서. 다정한 남자. 가끔 대낮부터 술에 취한 사람들이 휘청이며 돌아다닐 때면, 구씨 아저씨가 근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든든하다. 얼마 전, 눈썹문신을 한 후로 인상이 더 험악해져서 더욱더 그렇다.
골목길 끝자락 주택에 사는 종현이는 학교에 가려면 우리 가게 앞을 지나가야 한다. 유치원생이었던 종현이는 올해로 초등학생이 되었다. 유치원생일 땐 뛰어가면서도 환하게 인사를 해주더니, 초딩으로 신분이 상승된 뒤로는 날이 갈수록 시크해져서 날 서운하게 만든다. 어제는 골목을 지나가며 가게를 곁눈질로 힐끔 보더니 인사도 없이 도도하게 걸어갔다. 이놈의 자식이 분명 나랑 눈이 마주쳤는데도 말이다! 당장 밖으로 뛰쳐나가서 “얌마 그동안 내가 사준 아이스크림이랑 쪼꼬렛이 얼만데 쌩까냐!” 고 외치고 싶었지만, 나는 종현이보다 스물다섯 살이나 많은 어른이니까 참았다.
종현이에게는 형아와 누나와 엄마가 있지만 아빠는 없는 것 같다. 가게에서 골목길을 지켜본 시간 동안 종현이가 아빠의 손을 잡고 지나간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피부관리실을 운영하는 그녀는 하루종일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저녁이면 항상 종현이와 함께 마트로 향한다. 피곤해 보이지만, 아들을 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낮에는 시크하게 굴던 종현이도, 엄마 앞에서는 개구쟁이다. 엄마 손을 꼭 잡고, 빙글빙글 돌며 골목길을 걸어간다. 종현의 엄마와 꾸벅 눈인사를 하면, 종현이도 그제서야 나에게 인사를 해준다. 여전히 몸은 엄마에게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한다. 나보다 몇 살 많아 보이지도 않는 저 여자는 얼마나 강하길래 혼자서 아이 셋을 키울 수 있을까. 어떻게 저렇게 피곤한 얼굴을 하고도 아이를 볼 땐 웃을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그녀가 안쓰럽다는 마음까지 들 때면, 오지랖을 너무 부린 것 같아 부끄러워 이내 생각을 거둔다.
가게 옆 세탁소 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무슨 사이인지 모르겠다. 처음엔 당연히 부부라고 생각했지만, 동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그냥 데리고 살아주는 거랬다. 깡마른 몸에 똑 떨어지는 단발머리를 한 할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동네를 삥글삥글 돈다. 어디 급히 갈 데가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냥 그런척 하면서 걷는 것 같다. 급하게 걷는 모습이 가끔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보이기도 하고, 겨울에 반팔을 입거나 여름에 목도리를 두르고 나타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도 한다. 할머니는 남들이 보거나 말거나 신경도 안쓰고 계속 걷는다.
그러다 종종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악을 지르며 화를 내기도 한다.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세탁소 앞까지 슬쩍 가보면, 할아버지는 조용히 다림질을 하고 있고, 할머니만 화가 난 듯 소리를 질러대고 있다. 할머니는 한참 동안 혼자서 화를 내다가 결국 제풀에 지쳐 다시 동네를 돌기 시작한다. 할아버지는 심하게 무신경하다. 할아버지가 화내는 걸 딱 한 번 본적이 있는데, 그가 스티로폼 박스에 애지중지 키우던 고추를 할머니가 뽑아버린 날이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도망가는 할머니 뒤로 삽을 들고 쫓아가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톰과 제리를 보는 것 같았다.
낮에는 중고차 딜러를 하고 밤에는 단란주점을 하는 조명철 아저씨는 늘 가게 문을 닫을 때쯤 와서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커피 되냐고 묻는다. 우리가 끝났다고 고개를 저으면 “아웅~ 왜 이렇게 일찍 닫어” 라며 앙탈을 부리고 간다. 어쩌다 한 번씩 마감이 늦게 끝나 커피를 사 갈 수 있을 때도 그는 가게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배를 내밀고, 한쪽 허리에 구찌 클러치백을 끼고, 짝다리를 집고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모습으로 밖에서 커피를 기다린다. 영락없는 건달의 모양이지만, 말투가 아줌마 같아서 그런지 무섭지는 않다. 그는 한 번도 우리의 커피를 제값 주고 산 적이 없다. 사천오백원짜리 커피를 늘 오천원짜리 현금을 주고 사가면서 잔돈은 받지 않기 때문이다. 오백원은 써비스라나 뭐라나. 그러면 우리는 고맙다는 인사로 쌍따봉을 날려준다. 오백원으로 허세를 부리는 아저씨가 웃기지만, 그래도 건달의 가오는 살려줘야 하니까.
마감이 끝난 후, 가게에서 친구의 생일파티가 있던 날이었다. 단란주점에서 일하는 외국인 아가씨들과 함께 가게 앞을 지나가던 조명철 아저씨가 궁금했는지 고개를 빼꼼 내밀고 무슨 날이냐고 물었다. 친구 생일이라 파티 중이라고 했더니 “아이쒸~ 친구 생일인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쥐” 라며 치킨을 시켜줬다. 허세왕 오지라퍼 조명철 아저씨. 우리의 쌍쌍따봉을 받은 아저씨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쿨하게 나갔지만, 그의 어깨는 기세등등하게 솟아있었다. 우리는 단란하게 둘러앉아 치킨을 먹었다. 나보다도 어려 보이는 여자들을 데리고 불법인지 합법인지 모를 일을 하며 우리에게 치킨을 사주는 조명철 아저씨는 나쁜 사람일까? 착한 사람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결론은 내리지 못했다. 어찌됐든 그가 사준 치킨은 맛있었다.
영업이 끝나면 가게를 밝히던 조명들을 모두 끄고 가게 밖으로 나온다. 밤이 됐는데도 골목은 여전히 밝다. 저마다의 삶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의 앞을 지나가지만, 이제는 얼른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문단속을 마친 영선이 가자! 하고 외친다. 우리도 그들 속에 섞여 들어간다. 서로의 고생을 치켜세우며 뚜벅뚜벅 걷는다.
「가게 밖의 사람들」
- 발행일 2025년 12월 17일
- 글쓴이 호연지
- 작은배가 진행하는 <일상묘사 : 수필 합평 모임>에서 탄생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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