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없이 후회없이」, 고구말랭이
얼마 전, 형선과 나는 널찍한 마당이 딸린 돌창고를 수선해 작업실을 마련했다. 제주에 살면서 꿈꾸던 것이 하나 있다면 한적한 시골에 낡은 돌창고를 장만하는 것이었는데, 이 공간은 비록 임대로 얻은 곳이긴 했지만 내겐 꿈을 이룬 거나 매한가지였다. 새로운 작업실은 집에서 왕복 두 시간 거리에 있다는 것마저 감수할 만큼 마음에 들었다. 다만 한 가지 거슬리는 점이라면 마당과 도로 사이가 훤하게 트여 있는 것이었다. 나는 동네 사람 그 누구도 관심 없는 내 사생활 보호를 위해 그 자리에 뭐라도 세워 경계를 치고 싶었다. 제주다운 돌담을 쌓을까? 세련된 콘크리트 벽이 나으려나? 며칠을 고민하던 중, 동네를 거닐다 잘 지어진 집 한 채를 마주쳤다. 그 집 정원엔 나무들이 줄지어 서서 울타리를 이루고 있었는데, 자연스럽고 운치 있으면서도 안이 쉽사리 들여다보이지 않는 점이 나를 매료시켰다. 나는 당장에 작업실 마당에다 나무 울타리를 세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마땅한 나무를 고르기 위해 단골 농장을 둘러보니, 낯익은 초록 이파리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언젠가 무심히 들여놓고 또 무심히 죽어 가게 내버려뒀던, 우리 집을 스쳐 간 화초 더미의 형상이 겹쳐 보였다. 동족의 비극적인 최후를 알리 없는 그 파릇한 초록빛을 보고 있자니 일종의 죄의식이 느껴졌고, 이번만큼은 정성을 담아 직접 나무를 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예전과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그들을 돌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농장 주인은 정원사를 섭외하라고 했지만, 비용도 만만치 않거니와 이미 내 손으로 심어야겠다는 결심이 선지라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형선 역시 비실비실한 내 몸뚱이가 미덥지 않았는지, 정원사를 부르는 값보다 약값이 더 나올 거라며 손사래부터 쳤다. 뭐든 뜻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애당초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반대하는 애인의 말을 무시한 채 무턱대고 일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사흘 밤낮으로 형선을 졸라 삽과 호미 한 자루씩을 얻어낼 수 있었다.
대망의 식목 하루 전, 얄궃은 우연으로 나는 장염에 걸렸다. 하지만 종일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복통에 시달리면서도 직접 나무를 심겠다는 고집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형선은 그토록 소원이라면 땅을 파줄 인력은 부르되, 심는 것만 직접 하면 되지 않겠냐고 나를 설득했다. 쇠약해진 기력 탓인지 간만에 형선의 말이 합리적으로 들렸고, 나는 어느새 당근마켓을 뒤지며 땅 구덩이를 파줄 일꾼을 찾고 있었다.
구인 광고를 올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지원서가 쏟아졌다. 소일거리를 찾는 사람이 꽤 많았고, 경력도 화려했다. 그중 후기가 좋은 일꾼 몇 명과 견적을 보는데, 한 사람이 남긴 말이 인상적이었다. “미련도 후회도 없이 일합니다.” 조금 과장된 듯한 그의 한 마디에 피식 웃음이 났다. 다른 일꾼들보다 일당이 비싼 편이었지만, 어쩐지 마음이 동해 그에게 일손을 부탁하기로 했다. 식목하는 날 아침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날씨 탓에 일을 미뤄야 하는 것은 아닌지 노파심이 들었던 나는 약속된 일꾼에게 문자를 보냈고, 그는 이 정도쯤이야 콧노래 나올 날씨라며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그 반응에 안심보다 아쉬움이 느껴진 걸 보면, 나의 노파심이란 핑계에 불과했으리라. 증명이라도 하듯이, 나는 그의 답장을 받고도 한참을 이부자리에서 꾸물대다 약속 시간에 늦고 말았다. 늘 다니던 길목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빠져나간 형선의 탓도 없진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부랴부랴 작업실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일꾼은 비를 맞으며 마당의 잡초를 뜯고 있었다. 나는 민망함과 미안한 마음에 다급하게 차에서 내려 그에게 사과를 건넸다. 그러나 그는 멋쩍을 만큼 태연하게 우리를 반기며 자기를 소개했다.
“오늘 구덩이 파주러 온 아저씹니더! 구덩이 아저씨라예!”
말씨를 보니 경상도 사나이인 것 같았고, 꽤나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통성명을 마친 구덩이 아저씨와 나는 담배를 태우며 그날 할 일을 의논했다. 나무는 반드시 내가 심어야 하니 절대 도와주지 말라고 당부하자, 그는 일거리가 줄었다고 천연스럽게 웃었다. 우리는 돌멩이 하나를 주워다 흙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려가며 나무 심을 자리를 표시했다. 순간 어린 시절에 자주 하던 사방치기 놀이가 생각났지만, 뜬금없는 추억에 빠질세라 입가에 번지던 웃음기를 없앴다. 어느 자리가 좋을지 몇 번씩 그리고 발로 비벼 지우기를 반복한 뒤에야 본격적인 일이 시작됐다. 구덩이 아저씨가 땅을 파고 옆으로 비키자 나는 땅속에 매립분을 집어넣었다. 그런데 나를 지켜보던 그가 갑자기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지금 뭐하는 기고?”
당황해서 반말이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아, 이거 매립분이에요. 땅속에 심는 화분이요. 나중에 건물 떠날 때 나무도 쉽게 떠가려고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나무에 빙의한 듯, 두 손을 모아 말했다.
“사장님아, 내를 좁은 화분에 가두지 말래이! 내 답답하다! 퍼갈 때 쪼매 귀찮으면 으때서? 이카면 내 제대로 못 큰데이!”
그러고는 이내 본래의 목소리로 돌아와, 자기가 나무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 같다며 그윽하고 요상한 웃음을 지었다. 순전히 자신의 생각일 뿐이라고 했지만, 조금 전 몸서리까지 치며 호소하던 나무의 모습에 압도돼 버린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고, 그는 다시 나무에 빙의되어 “사장님아, 고맙데이~ 현명한 선택이었데이~." 하고선 다시 구덩이 파는 일에 열중했다. 구덩이 아저씨와 나는 손발이 제법 잘 맞아서, 나무 다섯 그루를 심는 데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혼자서 심었다면 꿈도 못 꿨을 일이었기에 가끔은 형선의 말을 듣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줄지어 선 나무를 뿌듯하게 바라보던 구덩이 아저씨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나무 이름은 지었습니꺼?”
나는 멈칫했다. 나무 이름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구덩이 아저씨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나를 보며, 젊은 사람이 왜 이리 낭만이 없냐는 둥 구시렁거리더니 지금이라도 이름을 지어보라고 했다. 낭만이 없다는 말에 약간의 자극을 받은 나는 진지하게 나무 이름에 대해 고민했다. 낭만, 낭만이란 단어를 되뇌다 보니 불현듯 제주 친구들과 나누던 얘기가 떠올랐다. 우리가 늙으면 작은 마을에 모여 서로를 돌보며 살자던, 농담처럼 흘려보냈던 그 말이.
비에 젖은 흙냄새 속에서, 나는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곳에 그들의 이름을 붙인 나무를 심어두면, 그 낭만적인 농담이 현실이 될 것만 같았다.
“...형선이, 정원이, 오돌이 그리고 연지, 영선이, 은비, 민석이, 고요, 유라, 현지, 윤지, 하진이… 어, 나무가 한참 모자라네요.”
내 얘기를 듣던 구덩이 아저씨는 친구 나무도 심으라며 마당 한켠에 구덩이를 몇 개 더 파냈다.
“이건 팬서비스입니더~ 미련 없이! 후회 없이!”
옆에서 구경하던 형선은 싸인도 해달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한참 동안 비를 맞으며 땅을 파낸 그는 미련 없이 삽을 챙겨 차에 올랐다.
“내는 갑니더! 미련도 후회도 없쒸!”
나는 아무 데나 미련과 후회를 갖다 붙이는 구덩이 아저씨가 황당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 존경심 비슷한 것이 올라왔다. 형선과 나는 그의 낡은 트럭이 비좁은 돌담길을 돌아나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빗줄기가 조금 더 굵어졌다. 나는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마당을 서성였다. 흙 위에 우뚝 선 다섯 그루의 나무와 마주 서니, 그들이 사람인 양 느껴졌다. 아직은 얕은 뿌리와 성글은 가지를 가졌지만, 비에 젖은 잎사귀마다 생기가 번졌다. 그날 저녁, 나는 어린나무 몇 그루를 더 주문했다.
「미련없이 후회없이」
- 발행일 2025년 12월 17일
- 글쓴이 고구말랭이
- 작은배가 진행하는 <일상묘사 : 수필 합평 모임>에서 탄생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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