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링뱅크를 찾아서」, 우수비
“노동 후에 위스키 한 잔, 이 낙에 삽니다.”*
고단한 하루 끝에 마시는 위스키 한 잔이면 피로가 풀리는 사람. 남편 형렬은 그런 사람이다. 그는 퇴근 후 가장 먼저 개운하게 샤워를 한다. 그리고 그가 하나둘씩 모은 위스키들을 바라보다 그날의 기분에 맞는 한 개를 골라 두께가 종잇장처럼 얇은 유리잔에 따른다. 모든 준비를 마친 그는 티비 앞에 앉아 축구, 야구, UFC, 롤 경기를 보며 위스키를 마신다. 한 모금을 마시고서, 그는 “와오” 감탄사를 뱉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참 행복해 보인다. 형렬은 특별히 자주 마시는 위스키가 있다기보다 다양한 위스키를 골라 마시는 걸 좋아해서 기회가 될 때마다 하나씩 사 모은다. 그는 네이버 카페 ‘위스키 코냑 클럽‘과 앱 ‘데일리샷’을 자주 확인하고, 롯데마트 맥스에 있는 ‘보틀벙커’를 방앗간처럼 드나든다.
그에게는 그만의 위스키 쇼핑 철칙이 있다. 최저가로 살 것. 위스키는 좋아하지만, 터무니없이 비싼 돈을 주고 사기는 싫단다. 그래서 해외여행은 형렬에게 찬스다. 위스키를 면세가로 살 수 있기 때문에. 신혼여행을 런던과 파리로 가기 전, 형렬은 무지 들떠있었다. 그는 밤이면 침대에 누워 신라 면세점, 신세계 면세점 등 면세점 앱으로 위스키를 구경하고, 위스키에 관한 유튜브 영상을 보며 행복한 고민을 하다가 잠들었다. 형렬은 고심 끝에 카발란 비노바리끄와 올로로소 쉐리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형렬은 한껏 들떠 나에겐 이름부터 어려운 이 두 병의 위스키를 구매한 이유와 월드 위스키 챔피언에 우승한 주류 회사 카발란에 대해서 한참을 말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사건은 영화 ‘어쩔 수가 없다’를 보러 간 날 시작되었다. 나와 형렬은 영화관에 나란히 앉아, 같은 날, 같은 영화를 보았으나 형렬의 눈에만 유독 반짝거리는 게 하나 있었다. 주인공 ‘만수’가 업계 경쟁자 ‘선출’과 가까워지기 위해 들고 간 위스키 ‘스프링뱅크 15년‘이다. 내 눈에는 그저 술병이었으나 형렬은 박찬욱 감독이 특별히 스프링뱅크를 선택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며 흥분했다. 형렬위키에 따르면, 스프링뱅크는 모든 제조 과정을 자체적으로 진행하고, 인공색소도 넣지 않으며, 지금까지도 가족끼리 운영하는 뚝심 있는 스코틀랜드 주류 회사라고 했다. 형렬은 스프링뱅크에 완전히 매료되어 시세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생산량도 많지 않고 영화에 나오는 바람에 한국에서는 웃돈을 많이 주고 사야 했다. 남편은 런던과 파리가 스코틀랜드 근처이므로 물건이 더 많지 않겠냐며 신혼여행에 가서 구해보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미리 주문해 뒀던 카발란 어쩌구저쩌구 위스키들을 과감히 취소했다.
그렇게 우리는 의도치 않게 스프링뱅크를 찾아 이만 오천리를 날아가게 되었다. 14시간 비행 끝에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10월 말 런던은 공기가 차가웠고 비가 가늘게 내리고 있었다. 캐리어 2개와 우리를 태운 우버는 1시간을 넘게 런던 시내를 향해 달렸고 깜깜한 저녁이 되어서야 숙소 앞에 도착했다. 숙소에 짐을 풀자, 이뤄야 할 과업이 있는 형렬은 곧장 나갈 채비를 했다. 미리 검색해서 찾아둔 위스키샵을 가려는 속셈을 숨긴 채, 형렬은 나에겐 빅벤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숙소에서 나와 런던의 거리를 걸었다. 형렬은 우연히 마주친 듯이 자연스럽게 웨스트민스터사원 근처 한 위스키샵에 들어갔다. “캔 아이 파인...스프링뱅크 위스키...?” 쭈뼛쭈뼛 묻는 형렬에게 점원은 단호하게 20년 이하는 찾아보기 힘들 거라고 했다. 형렬은 10년, 12년, 15년을 원한다고 했다. 점원은 15년 이하를 찾아보려면 십 년 전으로 돌아가서 사는 게 빠를 거라고 말 같지 않은 말을 했다. 우리는 호기롭게 스프링뱅크를 찾아 타국에 왔으나, 쉽지는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우리는 런던에 있는 사흘간, 마주치는 위스키샵은 모두 들어가 스프링뱅크를 찾았다. 이 위스키가 뭐길래...인기가 워낙 많아서 씨가 말랐단다. 갔던 곳마다 점원들은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맛있으면...? 나는 형렬에게 무슨 맛인지 물었다. 그도 마셔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지만, 파인애플 향과 바닐라 향, 약간의 피트향이 난다고 했다. 나는 피트향이 뭐냐고 되물었다. 형렬은 쉽게 말하면 병원에서 나는 소독약 냄새 같은 향이라고 했다. 아무리 자세한 설명을 들어도 나는 도통 무슨 맛인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과일향과 소독약 냄새가 동시에 나면...맛있을까?
신혼여행 4일 차 우리는 유로스타를 타고 파리로 넘어갔다. 파리 사람들은 위스키보다는 와인을 즐겨 마시기 때문에 더욱 찾기 힘들다는 네이버 카페 후기를 본 형렬은 살짝 힘이 빠져 보였다. 그래도 포기를 모르는 형렬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숙소 근처 와인샵, 우연히 마주친 주류 가게들을 둘러보았다. 대부분의 가게에서는 취급하지 않는다고 했다. 파리에서는 수요가 너무 없어서 구하기 힘든 듯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던 날, 마레 지구로 향한 우리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바틀샵 한 곳을 들렀다. 역시나 스프링뱅크는 없었다. 아쉬워하며 돌아서려는 찰나, 점원이 우리를 붙잡았다. 확실하지 않지만, 본인이 자주 가는 바틀샵에서 스프링뱅크 10년, 15년, 18년을 본 것 같다고 했다. 점원이 알려준 곳은 마레 지구에서 거리가 꽤 있어서 당장 가기는 힘들었다. 우리는 신혼여행의 마지막 날인 내일 오전에 가보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바틀샵 오픈 시간에 맞추기 위해 일찍 숙소를 나섰다. 형렬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며 마음을 비웠다고 했다. 그러나 바틀샵과 점점 가까워지자, 하나님과 부처님을 찾기 시작했다. 나도 덩달아 간절해졌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만 ‘착한 일 많이 할 테니 스프링뱅크가 꼭 있게 해주세요.’라고 조건부 기도를 했다. 가게 문을 열자, 친근한 인상의 중국인 중년 남성이 우리를 맞았다. 형렬은 조심스럽게 스프링뱅크가 있는지 물었다. 점원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우리가 10일간 찾아 헤매던 그 위스키가 있는 위치로 걸어갔다. 마레 지구 바틀샵 점원의 말처럼 10년, 15년, 18년짜리 위스키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가격도 한국보다 훨씬 저렴했다. 그러나 불굴의 형렬은 점원에게 조금 더 할인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점원이 18년은 할인해 주겠다며 한국 시세의 반값을 제시했다. 한국과 가격 차이가 크게 나지 않던 15년은 포기하고 형렬은 스프링뱅크 10년, 18년을 한 병씩 구매했다.
런던과 파리의 주류 가게를 족히 15곳 이상을 찾아다닌 끝에 상봉한 스프링뱅크. 한국까지 무사히 가져갈 수 있도록 점원은 두 병을 정성스레 버블백에 포장해 주었다. 위스키 두 병이 담긴 쇼핑백을 건네든 형렬의 표정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그 표정이 마치 정말 원하던 선물을 받은 해맑은 아기 같아서 보고 있는 나도 웃음이 나왔다. 지칠 법도 한 여행 마지막 날, 그는 750ml 위스키 두 병이 담긴 쇼핑백을 하루 종일 들고 다녀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형렬은 이 낙에 사나보다.
*영화 ‘어쩔 수가 없다’에서 등장인물 ‘선출’의 대사
「스프링뱅크를 찾아서」
- 발행일 2025년 12월 17일
- 글쓴이 우수비
- 작은배가 진행하는 <일상묘사 : 수필 합평 모임>에서 탄생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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