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 조르바 100」, 왈

「미션! 조르바 100」, 왈

6평짜리 원룸의 침대 위, 스물네 살의 나는 무기력을 이불처럼 덮고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특별한 일 없이 반복되는 일상, 매일 똑같이 흐르는 시간, 그리고 그 속에 파묻혀 숨만 축내고 있는 나.

대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졸업장과 안정적인 직장이라는 비빌 언덕이 주어지면 아무것도 도전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해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다니던 미대를 돌연 자퇴했다. 나에겐 뭣도 없었지만, 학교를 벗어나면 내가 뭐라도 될 줄 알았다. 만화에선 늘 그렇게 되던데. 하지만 나는 만화 속 주인공이 아닌, 침대 위 잉여 인간이 되어있었다. 나의 삶에는 전환점이 필요했다. 그저 보잘것없어 보이는 내 삶이 싫었다. 내 인생으로 브이로그를 만들면 우리 엄마 빼고 아무도 봐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천장을 보던 시선이 느릿하게 책장으로 옮겨갔다. 몇 권 없는 책 중에는 유독 손이 잘 가지 않는, 묵직한 두께의 책이 한 권 있었다. 예전에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삶의 감각이 무뎌질 때 읽으면 좋은 책’이라는 추천사를 읽고 별생각 없이 구매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고전소설이었다. ‘언젠가 인생의 해답은 고전에 있다는 말을 들었지’. 나는 무거운 몸과 마음을 천천히 일으켜 책장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그리스인 조르바>를 꺼내어 먹기 싫은 반찬을 억지로 입안에 욱여넣듯 책을 펼쳤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두목’과 ‘조르바’라는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닌 인물들의 동행을 통해 진정한 자유와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소설이다. 그 속에서 조르바는 생각보단 행동으로 세상을 만나고 경험했다. 늘 행동보단 생각이 앞서던 나와는 달랐다. 나는 조르바의 삶과 자유를 향한 거침없는 열망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고, 책에 담긴 조르바의 말과 삶의 태도는 내 인생 좌우명으로 삼고 싶을 정도로 좋은 문장들이 많았다. 그중 ‘조르바는 낯선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한 것 속에 숨어 있는 무감각을 두려워했다.’라는 구절이 내 가슴에 깊이 들어왔다. 익숙함과 안전함 속에 만족하며 새로운 도전을 기피하고 있는 내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 순간, 뭐라도 시도하고 싶다는 생각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생각은 100일간의 이상하고도 장대한 삶의 미션을 수행하게 되는 시작점이 되었다.

일명 ‘조르바 미션’. 굳이 100일을 하기로 한 이유는, 호랑이와 곰이 쑥과 마늘을 100일 동안 먹어야 사람이 되듯 나 또한 100일 정도는 겪어야 조르바와 같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조르바 미션은 100일 동안 하루에 한 번, 일상 속에서 한 번도 해보지 않았거나 두려움 때문에 피했던 일을 해보는 것이었다. 어떤 미션을 할지는 당일에 직접 생각해 내거나, 친구들에게 아이디어를 구했다. 작고 하찮은 것이어도 상관없었다. 타성에 젖은 눅눅한 일상을 환기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의 조르바 미션은 길거리에 있는 라바콘을 머리에 뒤집어쓰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어서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산책하기, 10분 동안 뒤로 걷기, 평점이나 후기를 찾아보지 않고 영화 한 편 보기, 대중목욕탕에 가서 모르는 사람에게 등 밀어달라고 하기, 길바닥에서 굴러보기, 모르는 이웃에게 편지 써서 전달하기, 스마트폰 없이 여행하기, 남의 학교 건물에 몰래 들어가서 탐방하기, 톨게이트 요금 수납원과 셀카 찍기… 등. 생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낯선 행동엔 언제나 두려움이 들러붙었다. 포기하고 싶던 순간도 많았지만, 막상 해내고 나면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는 용기가 차올랐다.

유독 버거운 날도 있었다. 그날의 미션은 ‘지하철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승객과 대화하기’였다. 나에게 지하철이라는 공간은, 자칫 잘못 행동하면 바로 ‘1호선 빌런’과 같은 꼬리표가 붙기 때문에 행동거지가 더욱 조심스러워지는 곳이었다. 실패해도 도망칠 곳이 없다는 사실은 더 큰 압박감을 주었다. 마치 출구 없는 무대에 홀로 서 있는 기분. 하지만 이제 와서 물러설 순 없었다. 그동안 쌓아 올린 용기의 탑을 무너뜨릴 수는 없으니까. 이건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그래서 했다. 해야만 했다.

……는 무슨. 묵직한 인생 과제를 등에 업고 탄 지하철은 홍대 입구행이 아닌 지옥행 열차 같았다. 그리고 나의 옆자리에는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한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다. 말을 걸어야 하는데, 말 대신 심장이 목구멍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아주머니, 다음 역에서 그냥 내려주시면 안 될까요. 저는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단 말이에요. 제발, 제발…’ 마음속에서 간절히 외쳐대는 겁쟁이의 말이 아주머니에게 닿을 리 없었다. 주변을 둘러봤다. 지하철 안에는 스마트폰을 응시하는 건조한 눈동자들로 가득했다. ‘내가 입을 뗀 순간 저 수백 개의 눈알이 나를 갈기갈기 찢고 말 거야.’ 나 자신이 만들어낸 두려움이 마구잡이로 몸집을 부풀리고 있었다. “크흠, 흠.” 애꿎은 헛기침만 나왔다. 머릿속이 하얘져서 무슨 말로 운을 띄워야 할지 몰랐다. 생각을 해봤자, 생각대로 말이 나올 리 없었다. 이대로 있으면 우물쭈물의 무한 굴레에 빠질 것만 같았다. 일단 무슨 말이든 던져야 했다.

”저, 저기...”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 나를 쳐다보곤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에게 말을 건 게 확실한 건지 확인하려는 눈치였다. 아주머니의 머릿속에 ‘이상한 사람’이라는 단어가 스치기 전에 어서 말을 이어야 했다.

”지금껏 살아보셨을 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생각보다 주둥이가 앞섰다. 영락없이 이상한 사람의 질문이었다. 아주머니의 당황한 숨소리가 맴도는 그 찰나의 침묵.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대한 사과를 드리려는 순간, 아주머니가 입을 떼었다.

”갑자기 이런 질문을 왜 하시는 거예요…?”
아주머니는 나를 무척이나 경계했다. 내가 그다음 말로 도를 아냐고 물어볼 것만 같았나 보다. 나는 두서없이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 다름 아니라 제가 너무 백수처럼 살다가요… 삶이 무기력해져서… 좀 벗어나려고 그, 안 해본 일들을 하는 100일 동안 미션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그중 하나가 이건데, 어… 지하철에서 옆 사람한테 말 걸어보는 거요. 용기를 내려고… 아, 어쨌든 당황스러우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아~ 저는 이상한 사람인 줄 알고요. 호호, 그러셨구나.”
멍청하고도 장황한 설명이었지만 아주머니는 그제야 경계가 풀리고 질문에 대한 대답을 했다. 아주머니는 학창 시절에 밴드에서 기타를 쳤다고 했다. 그때만큼 자신답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결국 꿈을 포기했어요. 지금도 그걸 후회해요. 살아보니 알겠더라고요. 상황이 어떻든, 하고 싶은 건 그냥 해야 한다는 걸요. 남들이 뭐라 해도 부딪혀봐야 해요. 예전엔 어른들이 그런 말을 하면 이해하지 못했는데, 막상 제가 그 나이가 되어보니 알겠어요. 학생, 지금 보기 좋아요. 응원할게요.”

아주머니는 마치 과거의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듯했다. 나는 말을 걸기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 순간을 남기기 위해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때만큼은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날 나의 목적지는 홍대 입구도, 지옥도 아니었다. 이대로 도전하며 살아가도 좋을 용기였다.


「미션! 조르바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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