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이라는 사건」, 고은비

「임신이라는 사건」, 고은비

“아기집이 보이네요. 6주 정도 된 거 같고요. 심장 박동도 아주 좋아요.”

내 질 안에서 차가운 막대를 휘적이며 초음파 화면을 보던 의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미 임신 테스트기로 뚜렷한 두 줄을 확인한 후 방문한 산부인과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기 심장 소리까지 듣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크게 증폭된 심장 소리는 ‘쿵쿵쿵’이 아닌 ‘북적북적북적북적’처럼 들렸고, 아주 우렁찼다. 크기가 6mm밖에 되지 않는 멸치 같은 존재에게 심장이 있다니. 그리고 그게 저렇게 빠르게 뛴다니. 믿기지 않았다.

산부인과 진료 의자 위에서 다리를 쩍 벌리고 앉은 채로, 나는 의사에게 축하 인사를 받았다. 벙찐 나를 대신해 뒤에 앉아서 초음파 화면을 함께 보고 있던 남편이 작은 목소리로 감사하다고 답했다. 의사는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보라고 했지만 나와 남편은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아는 게 없으니 모르는 게 뭔지도 몰랐다. 그냥 귀 주변이 계속 북적대는 것 같았다.

처음 몸이 이상하다고 느낀 건 가슴 통증 때문이었다. 물론 생리가 오기 전에도 가슴이 아프긴 했지만, 분명 평소와는 다른 감각이었다. 가슴 두 쪽에만 유난히 강한 중력이 적용되는 것처럼, 몸의 방향을 바꾸면 그쪽으로 가슴이 훅-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생리 주기가 불규칙한 편이긴 했지만 생리가 늦어지고 있는 것 역시 마음에 걸렸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남편에게 부탁해 임신 테스트기를 사 왔다. 소변이 닿자마자 빠르게 모습을 드러내는 두 줄을 봤을 땐 기쁘기보다 당황스러웠다. 결혼한 지 만 5년을 곧 꽉 채우는 부부였지만, 계획한 임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계획과 무계획의 중간, 그러니까 한 번의 충동에 가까웠다. 나는 오랫동안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아왔고, 가끔은 남편을 닮은 생명체가 세상에 태어난다면 귀엽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뿐이었다. 그러다 한 번, 정말 딱 한 번 ‘아이를 낳아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 그날 밤. 거대한 심장 소리를 가진 아기가 우리 두 사람에게 찾아왔다. 그 한 번을 기다려 온 것처럼 정확하게 난자와 정자가 만나서, 착상하고, 분열을 거듭하고, 심장까지 갖춘 것이다. 이 첩보 작전은 6주에 걸쳐 서서히 진행됐을 테지만, 막상 자궁의 주인인 나는 까맣게 몰랐다.

의사는 10일 뒤, 그러니까 아기가 8주 1일 차 되는 날에 다시 진료를 보러 오라고 했다. 초음파 사진이 붙어있는 산모 수첩을 챙기고, 간호사가 알려준 대로 보건소에 들러 분홍색 임산부 배지와 엽산 영양제를 받아 들고서도 현실 감각은 없었다. 남편의 상황도 나와 크게 달라 보이진 않았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그는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임신과 출산에 대한 내 입장을 잘 알고 있는 만큼, 좋아하고 싶은데 나 때문에 참는 거 같았고 걱정되는데 티 내도 될지 고민하는 것 같기도 했다. “심장 소리 듣다가 살짝 울뻔했는데, 너무 짧게 들려줘서 눈물이 쏙 들어갔어....흐흐.” 실없이 웃는 그의 얼굴을 보니 그래도 조금은 긴장이 풀렸다.

집에 돌아와 산모 수첩을 열어 초음파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초기 임산부가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 검색해 봤다. 그 과정에서 임신 10주까지는 아기를 ‘태아’도 아닌 ‘배아’라고 부른다는 것, 그리고 전체 유산의 98퍼센트 정도가 임신 후 12주 이내에 일어난다는 정보를 새롭게 알게 됐다. 초기 유산은 부모의 잘못이 아니라 세포 분열과 착상 과정에 문제가 있어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했다. 

수많은 임신 초기 유산 경험담을 읽으면서, 다음에 병원에 갈 때쯤엔 내 뱃속에 아기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를 바랐다기보다는, 그냥 원래 없던 것이었으니 다시 사라질 수도 있다고 여기는 쪽이 더 맞는 방향 같았다. 그래서 가족들과 가까운 친구들에게는 아직 소식을 알리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는 임산부가 챙겨야 하는 일상 속 체크리스트를 착실하게 지켜나갔다. 난생 챙겨 먹은 적 없던 엽산과 비타민D를 아침마다 물과 함께 삼켰고, 임산부가 하면 안 된다는 요가 동작을 챗지피티에게 물어봤고, 밤마다 바르던 로션의 성분을 검색해 봤다. 그러면서도 나는 속으로 ‘이 배아는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기를 지키고 싶은 건지, 없는 척하며 지내고 싶은 건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모호한 내 마음과 다르게, 병원에 다녀온 후 아기는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알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면 가슴이 찢어져 나갈 것처럼 아파서 나도 모르게 양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어 위로 올려줘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입덧이 시작됐다. 처음 내 속을 울렁이게 한 건 갓 지은 밥이었다. 밥솥에서 나오는 증기 냄새가 너무나도 역했다. 매일 쓰던 샴푸, 바디워시 향기는 씻기 싫을 정도로 강하게 느껴졌다. 손에 남는 비누 향마저 힘들어서 모든 제품을 향이 없는 것으로 바꿔야 했을 정도였다. 아침이고 낮이고 시도 때도 없이 잠이 쏟아졌고, 전에 없던 편두통과 골반 통증이 생겼다. 아직 1cm도 되지 않은 작은 생명체가 대형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내 몸의 호르몬 체계를 통솔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컨디션이 좋은 날도 있었다. ‘왜 오늘은 김치 냄새를 맡을 만한 거지? 왜 낮잠을 안 잤는데 견딜 만하지?’ 온데간데없어진 가슴 통증이 어색해서, 나는 일부러 가슴을 꽉 쥐어보기도 했다. 임신 초기에는 초음파를 보지 않는 이상 아기가 잘 있는지 알 수 없다. 병원에 가지 않고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호르몬의 변화를 몸으로 느끼는 일뿐이다. ‘입덧이 갑자기 없어지면 병원에 가봐야 한다’는 조언을 접한 후로, 모든 임신 초기 증상이 자궁에서 보내는 텔레파시처럼 여겨졌다. 자신이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메시지를 위와 가슴을 통해 보내는 이상한 생명체라니. 속이 울렁거리고 사타구니가 욱신거릴 때마다 나는 ‘내 속에 아기가 있다’는 사실을 되려 자각하게 됐다. 자궁이 보내는 온갖 신호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나는 임신이라는 갑작스러운 사건에 매일 조금씩 적응해 나갔다.

두 번째 검진을 받기 위해 기다렸던 열흘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긴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뭘 해도 이렇게까지 시간이 느리게 흐른 적은 처음이었다. 나와 남편은 그 지루한 기간을 산책으로 채웠다. 우리는 집 주변 공원을 걸으면서 부모가 되는 것에 대해 끝없이 이야기했다. 좁은 집에서 아기를 키우려면 필요한 조치,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과 물려주고 싶지 않은 것, 신생아를 키우면서 지금 하는 일을 유지할 방법, 그리고 수많은 아기의 이름 아이디어를 함께 나눴다. 나와 남편은 아기가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다는 점에서 생각이 같았기 때문에,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이름을 하나씩 떠올리며 소리 내 불러봤다. 우리의 산책이 길어질수록 아기와 함께하는 삶이 구체적으로 그려졌다.

8주 1일 차에 찾은 병원에서, 우리는 다시 북적북적북적 거리는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강낭콩 같던 배아는 하리보 젤리처럼 변해있었고, 크기는 여전히 손가락 한 마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아기가 주 수에 맞게 잘 크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가슴이 푹 하고 놓였다. 의사는 추석 연휴가 끼어있으니, 3주 후에 다시 만나서 초음파도 보고 1차 기형아 검사를 진행하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3주라니. 열흘도 그렇게 지난했는데, 3주를 기다려야 한다니. 게다가 ‘기형아 검사’는 이름부터 이미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열흘 전과 다르게, 나는 좀 더 초연한 마음으로 의사에게 미리 준비한 질문 몇 가지를 물을 수 있었다. 비용을 내기 위해 접수처로 갔을 때, 간호사는 자연스럽게 나를 ‘엄마’라고, 그리고 남편을 ‘아빠’라고 불렀다. 어색한 호칭에 놀라긴 했어도, 신기하고 수줍은 마음이 금세 뒤따라왔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남편에게 말했다. “인간이 10개월씩이나 임신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나 봐. 우리처럼 준비 안 된 부모라도 10개월 뒤에는 좀 달라져 있겠지.” 태어날 때 몸무게가 100kg이나 되는 코끼리도 임신 기간은 20개월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인간의 임신 기간이 이렇게 유독 긴 것은 아기가 아니라 부모 될 사람들을 위한 인류 진화의 결과가 아닐까. 남편은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근데, 아이가 누구를 닮았을까?” 매사에 나만큼 진지하지 않은 남편 덕분에 오히려 안심됐다. 오늘은 가족들에게 임신 소식을 꼭 알려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우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병원 건물을 나섰다.


「임신이라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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