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던 철심처럼」, 고은비

「숨어있던 철심처럼」, 고은비

방문 재활 치료사가 ‘무릎이나 고관절에 수술을 받은 적 있느냐’고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안방 침대에 걸터앉은 채 소처럼 큰 눈을 끔뻑이기만 할 뿐 답이 없었다. 정적이 의아하다는 듯이 치료사가 옆에 있던 나를 쳐다봤지만, 나도 딱히 아는 건 없었다.
“무릎이나 고관절에 철심이 남아 있으면 재활하다가 오히려 안 좋아지는 수가 있거든요. 정확한 정보를 알아야 제가 적절하게 처치할 수 있어요.”
엄마는 잘 모르겠다고, 사고 당시와 그 이후 몇 달간의 기억이 없다고 답했다. 사고 직후 엄마는 정신을 잃고 중환자실에 누워있었으며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나서야 깨어날 수 있었다는 내 설명을 듣고 나서야 치료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그제야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표정으로 바지 밑단을 끌어 올리더니 오른쪽 무릎을 보여줬다. 나중에 보니 여기에 흉터가 있었고, 아마도 그때 받은 수술 자국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나와 치료사를 번갈아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이 조금의 확신도 없이 바르르 떨렸다.

엄마는 25년 전 교통사고로 편측 마비 장애를 얻었다. 사고 당시 뇌를 다친 탓에 그때도 지금도 몸의 왼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움직일 수 없다. 엄마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후 말하고 먹는 것 같은 기본적인 생활 방식조차 새로 익혀야 했다. 2년간 장기 입원 병동에서 생활하면서 지독한 재활 치료 과정을 거쳤다. 덕분에 지팡이에 의지해 걸을 수 있게 됐지만,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다시 휠체어에 앉게 됐다. 무리해서 걸을수록 마비된 왼쪽 몸에 부담이 갔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안 좋아질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엄마의 몸은 균형을 잃어갔다. 고개가 점점 오른쪽으로 치우쳤고, 걸을 때 왼쪽 무릎이 과하게 뒤로 빠지는 바람에 통증을 호소했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른쪽 몸에만 의지해 생활한 탓에 엄마의 몸은 서서히 변형되어 갔다.

더 늦기 전에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던 참에 나는 SNS에서 우연히 한 업체를 알게 됐다. 집으로 재활 치료사가 직접 방문해서 일대일로 맞춤 운동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었다. 제주에 직영으로 운영하는 지사가 있으며 24시간 전화 상담이 가능하다는 문구를 보자마자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상담사는 아주 친절했다. 자신들은 일회성으로 몸을 스트레칭해 주거나 마사지를 해주는 게 아니라 ‘운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업체이며, 모든 치료사는 평균 15년 경력을 가진 전문가라는 그의 설명이 믿음직스러웠다. 원한다면 30분 무료 방문 진단이 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주저 없이 하고 싶다고 답했다. 상담을 마친 후 일정을 잡기 위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의사를 물어봤을 때, 엄마는 비싼 가격을 부담스러워했다. 나는 첫 방문은 무료라는 점을 들어 엄마를 설득했다. 진단만 받고 수업을 연장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에 엄마는 그러면 해보겠다고 답했다.

"저희 엄마 의지가 진짜 대단해요. 엄마한테 당뇨가 있는데, 그거 때문에 식단이랑 실내 자전거만으로 10kg 넘게 감량했거든요. 그걸 보고 와, 우리 엄마 아직 진짜 젊구나, 지금이라도 운동 시작하면 더 나아질지 모르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방문 재활도 신청한 거예요."
자신이 젊다고 생각한다는 딸의 말을 들으며, 엄마는 수줍은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나는 진지했다. 결혼을 일찍 한 탓에 서른 넘은 딸을 둘이나 두고도 엄마의 나이는 아직 쉰여덟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픈 몸으로 살림을 챙기고, 우리의 끼니를 책임지고, 두 자식을 모두 서울로 유학 보낸 엄마는 아주 억척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웃을 땐 표정이 소녀처럼 활짝 폈다. ‘늘감사하고늘사랑하자’는 문구를 카카오톡 프로필에 10년 넘도록 걸어 둔 사람답게, 엄마는 좌절하는 대신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하게 해냈다. 치료사는 까르르 웃는 엄마를 따라 미소를 지으면서도 프로답게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주어진 시간이 30분밖에 없으니 몇 가지 테스트를 먼저 진행하자고 말했다.

짧은 시간 안에 뭘 제대로 알 수나 있을까 싶었던 내 우려는 오산이었다. 치료사는 엄마에게 바로 서보라고 말했고, 침대에서 붙박이장까지 지팡이를 짚고 걸어보라 주문한 후 타이머로 시간을 쟀다. 휠체어에 다시 앉게 한 다음, 가능한 만큼 왼쪽 다리를 들어보라고 시키기도 했다. 엄마는 온몸에 힘을 주고 지시에 따르려고 노력했지만, 생각처럼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또 어떤 부분에서는 예상 밖으로 잘 움직이기도 했다.
“일단, 어머님 왼쪽 몸에 근육이 거의 없어요. 휠체어를 타다 보니 남아있는 근육도 잘 쓰지 못했던 거 같고요. 지금처럼 왼쪽이 약해지다 보면, 점점 균형이 무너져서 건강한 오른쪽에도 무리가 올 거예요. 걷는 것도 힘들어질 거고, 최악의 상황에는 결국 누워서 생활하게 되실지도 몰라요.”
마비라는 것이 한순간 변화한 몸에 대한 진단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나빠지는 질병이라는 사실을 나는 그때 제대로 알았다. 치료사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내가 엄마의 몸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깨달음이 들어 부끄러웠다.

엄마의 몸과 병에 대해 모른다는 것.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고가 나던 해에 나는 아홉 살이었다. 모두가 어린 나와 언니 앞에서 사고에 관한 이야기를 숨겼다. 눈앞에 분명 벌어지고 있는 일을 왜 이렇게까지 숨기나 싶을 정도로 그랬다. 엄마가 머리를 빡빡 민 채 병원에 누워 있고, 남동생이 세상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는데도 아무런 설명을 들을 수 없었다. 어른들의 무거운 표정 앞에서 나에게는 어떤 질문도 허락되지 않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내가 가진 궁금증이 누군가를 곤란하게 만들 거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았다. 집안 어른들이 혀를 차며 소곤거리는 이야기를 엿듣는 게 그때 내가 알 수 있는 전부였다. 쉬쉬하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제대로 아는 것 없이 컸다.

엄마가 병원에서 퇴원해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우리는 이런 상황이 아무것도 아닌 듯 굴었다. 그저 입 밖으로 꺼내지만 않으면 무사한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나는 이런 태도를 착실히 배워갔다.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던 학교 친구들이 내 뒤에서 엄마의 장애에 관해 조롱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나는 평소처럼 행동했다. 앞에서 대놓고 나를 놀리지만 않는다면 그냥 모르는 척할 수 있었으니까. 주변 사람들이 나를 엄마와 무관하게 바라봐주길 원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부터 아무렇지 않아야 했다. 나는 모르는 만큼 괜찮을 수 있었다. 모르는 만큼 엄마라는 사건과 거리를 둘 수 있었다.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라, 엄마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모른다는 면죄부를 방패 삼아, 병과 싸우고 있는 엄마를 홀로 내버려두었다는 죄책감이 진단을 받는 내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첫 방문은 결국 30분을 훌쩍 넘어 1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엄마도 나도 궁금한 점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치료사를 배웅하기 위해 현관까지 따라갔을 때, 그는 만약 앞으로 계속 치료받길 원한다면 꼭 병원에 가서 지난 수술 이력을 확인해 보라고 권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만기가 4개월 남은 적금을 깼다. 그리고 그 돈으로 방문 재활 10회권을 구매했다. 매주 방문은 가격이 부담스러워서, 치료는 2주에 한 번 진행하고 평소에는 엄마가 혼자 운동할 수 있게끔 숙제를 내는 방식으로 진행해 달라 부탁했다. 엄마는 이 소식을 듣고 어쩔 줄 몰라 하며 고마워했다. 그리고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근데, 내가 숙제를 받으면 잘할 수 있을까?”
엄마는 치료사가 시킨 진단 테스트가 하나같이 어려웠다고 푸념했다. 나는 그냥 헬스장에서 PT 받는 거랑 마찬가지로 생각하라며, 앞으로 내가 자주 와서 엄마가 혼자 운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엄마를 달랬다.

며칠 후 나는 시간을 내서 엄마와 함께 한마음병원으로 향했다. 조수석에 앉은 엄마와 수다를 떨며 차를 모는데, 창밖으로 조금씩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오랜만에 가는 동네였지만 어렸을 적 학교를 마치고 병원까지 걸어가며 봤던 공원과 큰 가로수들이 너무나도 그대로였다. 주차를 마치고 엄마가 탄 휠체어를 밀며 병원 로비에 들어섰을 때, 소독한 것처럼 깨끗한 병원 특유의 공기 냄새가 코밑을 훅 파고들어 왔다. 나는 그곳의 냄새가 너무나도 익숙해서 조금 놀랐다. 냄새만큼 병원의 풍경 또한 여전했다. 지난 25년간 단 한 번의 리뉴얼도 거치지 않은 것 같았다.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는 나와 달리, 엄마는 덤덤했다. 퇴원한 후로도 몇 달에 한 번씩 약을 타기 위해 정기적으로 병원에 방문해 왔기 때문이다.

1층 로비에 있는 재무과에서 진료를 신청한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재활의학과가 있는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북적이는 사람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모두 보행 연습을 하는 환자와 그들의 치료가 끝나길 기다리는 보호자들이었다. 치료사의 어깨 위에 두 팔을 얹은 채 한 발 한 발 힘겹게 걸음을 떼는 사람들이 치료실을 넘어 복도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공간에 비해 재활이 필요한 사람들은 턱없이 많아 보였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곳의 구조가 반가울 만큼 익숙했다. 맞아, 저기서 엄마가 보행 재활을 받았지. 그리고 매일 30분씩 여기 앉아서 전기 자극 치료를 받았지. 엄마가 재활을 받는 동안 할 일 없이 복도를 뛰어다니던 때가 생각나 향수가 돌던 차에, 간호사가 엄마를 알아보고 바로 진료실에 들어가도 된다고 말해 주었다. 띄엄띄엄 걷는 사람들 틈으로 문이 열린 재활의학과 진료실이 보였다.

교수는 무슨 이유로 찾아왔느냐고 엄마에게 물었다. 약을 타 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찾아와서 놀란 기색이었다. 엄마는 이번에 방문 재활 치료를 시작하게 됐는데, 이를 위해 무릎이나 고관절에 외과 수술을 받은 적 있는지 확인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교수는 어디 한번 보자며, 컴퓨터 모니터에 뼈를 촬영한 엑스레이 사진을 하나씩 펼쳐 보였다. 엄마의 예상대로 오른쪽 무릎에 골절 수술을 받았던 기록이 있었고, 생각지도 못했던 왼쪽 손목에도 철심이 남아 있었다. 나는 선생님과 엄마가 짧은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었다. 엄마의 몸에 숨어있던 철심 때문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단번에, 내가 교수의 얼굴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그는 25년 전 엄마가 병원 생활을 할 때에도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뭐지? 내가 어떻게 이 사람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거지? 당혹감과 함께 나를 덮친 건 원치 않았던 현실 인식이었다. 아홉 살의 내가 여기에 있었구나. 진짜 여기에 있었구나. 아, 내가 여기에 있었구나. 그 당연한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사람처럼 눈앞이 멍했다.

교수는 이거 때문에 온 거라면 진료를 취소할 테니 수납하지 않고 그냥 가도 괜찮다고, 약 타는 날에 다시 보자고 엄마에게 말했다. 나는 덩달아 감사하다고 인사를 건넨 후 빠르게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까지 가는 내내 나는 말없이 엄마의 휠체어를 밀었다. 급한 운전 탓에 휠체어 바퀴가 끝없이 덜컹거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주차한 곳에 도착해 보니, 그새 누군가가 차를 바짝 붙여 옆자리에 세워둔 상태였다. 아무리 봐도 조수석까지 엄마의 휠체어가 들어갈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주변 그늘에 엄마의 휠체어를 잠시 세우고는 차를 먼저 빼는 게 좋겠다고 말한 후 운전석에 올랐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벌컥 눈물이 났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었다. 무서웠고, 분했고, 외로웠다. 그 순간, 엄마의 몸에 25년 동안 가만히 자리 잡고 있던 철심처럼 내 안에도 무언가가 소리 없이 숨어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는 단 한 번도, 엄마와 장애와 병원에 대해 모른 적 없었다. 그저 눌러왔을 뿐이었다. 이건 엄마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 사실이 무서워서 나는 옷소매를 늘려 빠르게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차에 시동을 걸었다.


「숨어있던 철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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