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담배를 사러 가는 길에」, 금비

아주 기분이 안 좋은 밤이었다. 분하고, 화가 치밀고, 짜증 나 죽겠고, 속에선 열불 천불이 났다. 내 눈은 이미 동태 눈깔이었는데 내 분노에 이글이글 눈알이 익어버려서 구운 동태눈깔인 상태였다. 활활 타는 심란한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 나는 뭐라도 해야 했다.
첫째로는 나만을 위한 저녁을 정성스레 차려 먹기. 밥통에서 밥을 푸고,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냈다. 후라이팬에는 계란 두 개를 깠다. 나는 내가 차린 밥을 모조리 먹어 치웠다. 보통 배가 부르면 기분이 풀리기도 하는데. 이번엔 아니었다. 배가 찼는데도 화가 가시질 않았다.
둘째로는 노래 부르기. 동네 코인 노래방으로 갔다. 5천 원으로 한 시간 동안 노래를 불렀다. 인기차트에서 아는 노래 몇 곡 불러주고, 내 애창곡 ‘코요테의 우리의 꿈’, ‘지오디의 촛불 하나’를 불렀다. 너무 화가 나서 즐길 수가 없잖아! 한 시간 동안 열창을 해도 기분이 영 아니었다. 어쩔 수 없다. 최후의 보루, 달리기를 하는 수밖에.
셋째로는 달리기. 밥 먹고 나서 노래도 부르고,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으니 달리기를 할 수 있는 좋은 타이밍이었다. 나는 집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땀이 뻘뻘 나게 달렸다. 힘들면 걷고 다시 화가 치밀면 뛰었다. 하지만 지치도록 운동장을 뛰어도 화는 꺼질 줄을 몰랐다. 여태껏 기분이 안 좋을 때 달리기를 하면 다 괜찮아졌는데. 그날이 처음이었다. 달리기를 하고 나서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던 게. 진 빠지게 달리면 화도 다 빠져나갔는데. 진만 빠지고 화는 계속 불타올랐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끓는 속을 잠재우기 위해 찬물 샤워를 했다. 악! 차거! 화난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것도 소용이 없었다. 몸을 다 씻고 나서 새 츄리닝을 꺼내 입고 책상 앞에 앉았다. 이것저것 다 해봐도 너무 화가 나는데,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속은 부글부글대고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그러다 문득 한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담배.’
담배 생각이 났다. 담배를 피우면 이 더럽고 추잡한 기분이 나아질까? 담배는 백해무익이라 하지만 흡연하는 친구들의 말은 달랐다. “담배 피우면 스트레스가 금방 날아가.”, “담배 피우는 게 술 마시는 것보다 낫지. 기분 나아지는 데 5분이면 돼.”, "담배만 한 게 없다." 넘겨 들었던 말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래, 나도 담배를 피우면 이 엿 같은 기분이 연기처럼 다 사라지겠지. 어떤 방법으로도 안 풀리는 이내 마음을 담배로 속 시원하게 풀 수만 있다면.... 나는 얼른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나는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담배를 피워볼 생각도 안 했다. 딱 한 번 대학생 때 과제 스트레스 때문에 동기들과 담배를 피워보자고 계획을 세우긴 했지만, 말로만 하고 행동에는 옮기지 않았다. 담배는 어른들만 피울 수 있는 것인데 우리는 아직 어른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들 간은 작아가지고... 이때 말고는 담배를 피워볼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냄새 지독하고 건강에도 안 좋은 담배를 왜 돈을 주고서 피우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날이 처음이었다. 사람들이 왜 담배를 피우는지 진심으로 알 것 같던 게. 이해할 수 없던 일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게, 이제 나는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무슨 짓을 해도 분노가 가시지 않던 그 밤에 나는 내 생애 첫 담배를 피워보기로 결심했다. 고민만 하다가는 화가 사그라들기는커녕 곧 데싸져 버릴 것 같았다. 꼭지가 돌아버리기 전에 어서 집을 나서야 했다. 나는 호기롭게 편의점으로 향했다. 이번에야말로 진정으로 담배를 피울 때가 된 것이다.
난 편의점에 가서 당당하게 담배를 사고 싶었다. ‘무슨 담배 주세요.’ 깔끔하게 말하고 신속하게 계산하고 무심히 편의점을 나와서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라이터도 하나 주세요.’ 도 잊지 말고. 하지만 내가 담배에 대해 아는 거라곤 말보로 레드는 독한 거, 낙타가 그려진 카멜, 뭔진 모르겠지만 몇 미리가 있다는 것. 이 정도였다.
아는 것이 힘이다. 담배를 사려면 아는 것이 있어야 했다. 그냥 ‘담배 주세요’라고 말하면 서로 민망해질 것 같았다. 어리숙하게 담배를 사지 않기 위해 편의점으로 걸어가면서 핸드폰으로 담배에 대해 검색했다. 일단 담배 종류는 어떤 게 있는지, 이것저것 구경했다. 그러다 새로 알게 된 것은 담배에서 몇 미리는 담배 한 개비의 지름 길이가 아니라 타르 함량을 나타낸다는 사실이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담배를 알아갈수록 종류도 너무 많고, 정보도 끝이 없어서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더 어려워졌다. 그냥 ‘무슨 담배 주세요’만 하면 끝인 건지, ‘무슨 담배 몇 미리 주세요’ 해야 하는 건지. 담배의 세계는 참 복잡했다. 아 모르겠고 일단 그냥 편의점으로 계속 걸어갔다. 그러던 와중에 불쑥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
‘아 지갑 놓고 왔다.’
지갑을 안 들고 왔다. 집과 편의점 사이 중간지점까지 왔는데. 우리 집은 시내 끝자락에 있어서 주변엔 아무 편의 시설이 없었다. 집을 나와 편의점에 가려면 컴컴하고 여기저기 움푹 파인 시멘트 길을 내려가고 또 내려가야 했다.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 지갑을 가지고 나오려면 오르막길을 올라야 하는데, 그러기엔 너무 귀찮았다. 그렇지만 나는 담배 피워야 하는데? 지금 너무 화나는데? 왜 삼성 페이 등록을 안 해놨을까? 나는 나를 탓하면서 고민했다. 어떻게 하지.... 나는 편의점 쪽으로 내려가지도 않고,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모든 걸 보류하고서 길가 모퉁이 쪽으로 향했다.
으슥한 골목에서도 더 으슥한 쪽으로 갔다. 가로등 불빛이 울퉁불퉁한 바위벽에 부딪혀서 새까만 그림자를 만들어낸 곳이었다. 가로등이 밝게 빛을 내고 있는 만큼 골목 구석탱이 그림자는 어두웠다. 나는 그 어두침침한 그림자로 들어가서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했다. 어쩌지.... 에라 모르겠다. 나는 내 왼손 약지와 소지는 접고, 검지와 중지는 펼쳐서 입에 갖다 댔다. 엄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어정쩡한 상태로 뒀다. 그리고 입으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명치가 답답해질 정도로 공기를 빨아들였다. 입에 댄 손가락을 떼고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몸 안에 숨이 다 빠져나가도록 호흡을 내보냈다. 집에 가서 지갑을 가져오기는 귀찮지만 어쨌든 담배는 피울 거니까 겸사겸사 예행연습이라고 치고 담배 피우는 시늉을 했다. 문득 불도 붙여보고 싶었다. 나는 엄지로 딸깍 누르면 불이 나오는 라이터가 있다고 상상했다. 상상으로 담뱃갑에서 꺼낸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상상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는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담배를 빨고 연기와 숨을 힘차게 내뱉었다.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들이마실수록 담배가 더 빠르게 타고 있는 모양을 상상했다. 그러면서 더 깊고 세게 숨을 들이마셨다. 다시 숨을 후 내쉴 때는 하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나는 상상 담배를 피우다가 담배가 작아졌다 싶으면 오케이 사인처럼 엄지와 검지로 담배를 잡고, 불씨가 손가락에 닿을락 말락 할 때까지 피우기도 했다. 그러다 담배를 다 피웠으면 꽁초를 툭 던지고 발로 직직 비벼서 껐다. 나는 꽤 오랫동안 그림자 속에서 가로등 불빛을 보며 줄담배를 피워댔다.
한창 손 모양을 바꿔가며 담배 없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새삼 골목 구석에서 이러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웃겨 보일 것 같았다. 나는 혹여나 누가 나를 볼까 봐 슬쩍 눈치를 몇 번 봤는데, 그 골목이 밤에는 인적이 드문 곳이라 내가 가짜 담배를 피우는 동안 아무도 내 앞을 지나가지 않았다. 참 다행이었다. 그 누구도 이 모습을 보지 못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숨을 한껏 들이마시고 끝까지 내쉬고를 반복했다.
담배를 계속 태우다 보니 담배는 참 좋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밥을 잘 지어 먹어도 안 풀려, 노래를 불러도 소용없어, 힘들게 달리기하고 샤워까지 해도 답답했던 마음이 담배 덕분에 금세 편안해지다니. 담배는 피울만한 거였네. 아주 만족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진짜 담배는 피우지도 않았으면서.... 이렇게 된 마당에 담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크게 상관없었고, 나는 계속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걸 의식하면서 상상 연초를 피웠다.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고. 또 들이마시고 내쉬고. 저절로 내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게 됐다. 그러다 갑자기 알아차려지는 것이 있었다.
‘이거 호흡 명상 아닌가?’
유레카! 고작 이런 거에 기분이 좋아지다니. 나는 순식간에 신이 나버렸다. 이제 더 이상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내 마음에 있던 화는 다 누그러졌다. 아 속 시원해. 늦었으니까 이제 자자. 나는 쪼그려 있던 몸을 일으켜 세우고 아무 근심 없는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갔다.
「첫 담배를 사러 가는 길에」
- 발행일 2025년 8월 6일
- 글쓴이 금비
- 작은배가 진행하는 <일상묘사 : 수필 합평 모임>에서 탄생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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