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옥 (1)」, 고구말랭이

「백화옥 (1)」, 고구말랭이

내 눈에 비친 백화옥은 동네 여느 노인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 사이로 은은한 분 냄새가 퍼져 나왔고, 소라껍데기처럼 말아 올린 새까만 머리카락엔 세월이 스며들 틈조차 없어 보였다. 찰랑거리는 공단 치맛자락은 날마다 무지갯빛으로 색을 바꾸며, 그녀의 발끝을 따라 일렁였다. 그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지만, 그녀의 성미는 종종 그 위에 낙서를 해대곤 했다. 백화옥은 차나 커피 대신 병 콜라를 입에 달고 살았고, 담배 한 보루로 닷새를 버티지 못하는 골초였으며, 그녀의 낡은 전축에선 정신 사나운 뽕짝이 흥을 주체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행여 동네 할멈끼리 말싸움이라도 벌어지면, 목소리가 제일 큰 쪽이 우리 백화옥이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머리카락은 한 가닥 흐트러짐이 없었다.

‘백화옥’은 그녀의 옛 친구들만 부르던 애칭이었다. 이따금 우리 집을 찾던 이들이 “백화옥—” 하며 문지방을 들어설 때마다, 내겐 그 소리가 퍽 근사하게 들렸다. 나는 ‘백화옥’이라는 말에서 한 떨기 새하얀 꽃이나, 고요한 빛을 품은 옥구슬을 상상했다. 그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사람이 우리 할머니라니, 괜시리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래서인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저 멀리 개미만한 초록 대문이 보이기 시작하면 “백화옥~ 백화옥~" 하고, 온 동네가 떠나가라 그녀를 불러댔다. 백화옥은 쑥스러운 건지, 싫은 건지 모를 표정으로 달려 나와 “떽!” 하고 야단을 쳤지만, 나는 그 모습이 마냥 좋았다. 그 순간만큼은 엄마와 사는 옆집 아이가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바닥에 곧고 긴 선을 그린 다음, 그 선을 따라 걷는 거야. 발을 디디고, 앞꿈치에 다른 쪽 발을 갖다 대면서 걸어 봐. 그럼 예쁘고 반듯하게 걸을 수 있어.” 단정하고 정돈된 용모를 고집했던 백화옥은 내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많았다. 걸음걸이는 물론이거니와 외출 전, 내가 입을 옷을 고르고, 머리를 매만지던 손길은 모두 그녀의 것이었다. 두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훔쳐낼 때도 예외는 없었다. “이런 것 가지고 울면 사람들이 얕잡아 본다니까. 뚝 그쳐라, 뚝.” 동네에 소문난 울보였던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앞을 가리는 눈물을 감추려 죄 없는 천장을 쏘아보느라, 슬플 때마다 무서운 표정을 짓는 아이가 되었다. 아흔이 가깝도록 백화옥은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나를 다듬기에 여념이 없었으나, 한 가지 간과한 것은 당신의 손녀딸이 애초에 그 바람과 거리가 먼 유전자를 타고났다는 점이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엔 나와 이름이 같은 아이가 있었는데, 다른 애들은 그 애와 나를 ‘착한 김정원’과 ‘싸가지없는 김정원’으로 구분해서 불렀다. 둘 중 ‘싸가지 없는 김정원’이 내 몫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나의 불도저 같은 주둥이엔 브레이크가 장착되지 않아 그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교실에서 울고 있는 아이에게 “시끄러우니까 복도에 나가서 울어”라고 한다거나, 여성스럽다는 이유로 놀림당하던 남학생에게 “너 호모야?” 하고 묻기도 했다. 나는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내뱉을 뿐, 상대가 어떻게 느낄지에 대해선 무지한 아이였다. 이 순수악은 의도치 않게 친구들과 부딪히는 일이 잦았고, 또래 집단에서 가장 무거운 징계였던 ‘급식실에서 혼자 밥 먹기’ 처분을 받은 뒤에야,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다르게 말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표준말과 예쁜 말씨를 배워야 한다는 백화옥의 손에 끌려 웅변학원에 보내졌다. 끝내 그녀가 생각하는 예쁜 말씨와 웅변의 연관성을 찾지는 못하였으나, 말하는 기술은 필요했던 터라 군말 없이 학원 차에 올랐다. 웅변학원에 다닌 지 일주일쯤 지났을까. 그날은 단상에 올라 직접 쓴 연설문을 발표하는 수업이 있던 날이다. 평소와 별 다름없는 수업이었지만, 백화옥은 ‘단상’이란 말에 꽂혔는지 내 머리에 무스를 발라 빗어 재끼고, 어깨에 뽕이 잔뜩 들어간 호박소매 원피스를 꺼내 입혔다. 그리고 대문 앞까지 따라 나와 몇 번이고 매무새를 훑어본 뒤에야, 집을 나서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나는 백화옥의 호들갑으로 탄생한 광대 같은 모습을 당장에라도 벗어던지고 싶었지만, 옷장을 뒤져봤자 어차피 그 옷이 그 옷인지라 이내 단념하고 단상에 올랐다.

연설이 절정에 달았을 즈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안대상이라는 녀석이 내 목소리에 맥아리가 없다느니, 공주병에 걸렸다느니 하며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속으로 참을 인을 몇 번이나 새겨보았지만, 그놈의 입은 1절에서 멈출 기미가 없었다. 나는 결국 불같은 성질을 참지 못하고, 단상 아래로 뛰어 내려가 손에 쥐고 있던 원고지로 안대상의 따귀를 갈겼다. 그리고 입으로 한 번 더 내리쳤다. “넌 목소리에 맥아리를 좀 없애라. 너처럼 멍청한 놈이 하는 소리는 차라리 안 들리는 게 나아. 아니면 글 쓰는 실력을 늘리던가. 아, 맞다. 그건 멍청해서 안 되지?” 웅변 수업은 그 녀석과 나의 난투극으로 막을 내렸다. 그날 저녁, 집으로 걸려 온 학원 원장님의 전화는 나를 또 한 번 징계의 방으로 데려다 놓았다. “우리 애가 그럴 리가 없는데…” 믿기 어렵다는 듯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던 백화옥은, 열네 살 소녀의 유일한 낙이었던 만화 잡지 『파티』의 정기 구독을 해지해 버리고 말았다. ‘난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세상은 왜 날 가만두지 않는 걸까.’ 자신의 신세가 너무도 처량했던 나는 방에 틀어박힌 채 창밖을 보며, 애창곡인 김자옥의 〈공주는 외로워〉를 흥얼거렸다. 창문 밖에 달린 하얀 방범창은 그날따라 유난히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이혼이 흔치 않던 시절, 부모를 대신해 나를 길러준 백화옥은 세상의 시선에 누구보다 민감했다. 그 무렵엔 부모가 갈라선 집 아이는 어딘가 모자란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고, 옷차림 하나, 말투 하나까지 시골 아낙네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십상이었다. 그래서인지 백화옥의 가르침 뒤엔 “허투루 보이면 애미 애비 없이 큰 애라고 손가락질할라”라는 말이 자주 따라붙었다. 아마도 그녀가 내게 일러주었던 곧고 긴 선이란, 정상 가족이라는 울타리 바깥에서 자란 내가 세상의 편견을 피해 걸어야 할 유일한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내 처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선 밖으로 벗어나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썼다. 내가 백화옥의 백발을 처음으로 본 것은 스물두 살, 그녀의 병상을 마지막으로 찾았을 때였다. 나는 그제야 힘없이 흐트러진 그녀를 마주하며, 내 할머니가 나만큼이나 애쓰며 살아온 시간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다 큰 여자가 아무 데서나 울고 다니면 못쓴다는 말과 함께, 자신을 묻어두고 가는 길에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승에 남은 사람이 미련을 거두지 못하면, 망자가 걸음을 뗄 수 없다는 이유였다. 나는 백화옥이 가야 할 길에 그 무엇도 걸림돌이 되지 않길 바라며, 그녀를 두고 온 자리를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십오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시는 그녀를 찾아가지 못했다.


「백화옥 (1)」

  • 발행일 2025년 8월 6일
  • 글쓴이 고구말랭이 emergencycrop@gmail.com
  • 작은배가 진행하는 <일상묘사 : 수필 합평 모임>에서 탄생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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