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다움'이라는 환상
나는 한 가지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설계된 제품이 아니다.
지난 10월 27일, '나답게 살기 위한 실험'이라는 주제로 80명의 청중 앞에서 치지레이지의 경험담을 나눴다. 강연 준비를 위해 받아본 사전 질문지를 꼼꼼히 확인하던 중, 한 질문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사장님이 생각하는 '치지레이지 다움'은 무엇인가요?"
살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를 꼽자면, 대학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준비하던 때가 떠오른다. 그 즈음 나는 매일 카페에 앉아 텅 빈 노트북 화면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고는 했다. '자기소개서'라고 하지만 '상품 기획서'나 다름없는 문서를 앞에 두고, 나는 고은비라는 제품을 예쁜 말로 포장하고자 노력했다. 주어진 500자를 꾸역꾸역 채우면서 나는 늘 거짓말하는 기분을 느꼈다. 처음으로 스스로를 마케팅하고 세일즈 해야 했던 날들. 그때의 경험은 나에게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
취준생 신분에서 벗어난 것이 한참 전 일이고, 내가 짠 판에서 나를 위한 게임을 하겠다며 퇴사한 지도 2년이나 지났다. 내 인생을 두고 합격을 줄까 불합격을 줄까 점수를 매기는 면접관은 사라진지 오래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은 여전히 나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나다움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한 층 더 업그레이드되어 나를 괴롭힌다. 치지레이지다움은 무엇인가. 간단한 질문 앞에서 작아진 나를 보며 한동안 울적한 날을 보냈다.
인스타그램 프로필 소개 문구를 썼다 지웠다 반복하면서, 자기소개서를 화면에 띄우고 좌절하던 과거의 나를 떠올린다. 퍼스널 브랜딩, 취향, 커리어 기획이라는 단어가 난무하는 요즘, 나만의 캐치프레이즈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못살게 구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나다운 게 돈이 되는 세상이라고들 한다. 미션과 비전이 없으면 제대로 된 브랜드가 아니라고도 한다. 하지만 오늘 하루 느낀 성취가 이렇게 확실한데. 손님과 공유하는 감정과 콘텐츠로 얻는 보람이 이렇게나 선명한데. 그럴싸한 소개 문장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이 볼품 없어져 버린다니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이다.
'치지레이지다움'을 묻는 질문에 들려줄 답은 여전히 없다. 하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 중 나 답지 않은 건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만든 샌드위치, 내가 꾸민 공간, 내가 쓴 글, 내가 나눈 대화. 모든 것이 구석구석 나를 닮았다. 하지만 이 중 무엇 하나가 내 전부를 대변할 수는 없다. 인간은 한 가지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설계된 제품이 아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소개할 수 있는 문장 한 줄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백 가지 발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