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은 혼자 하는 게 아니야

<화 좀 안 내고 살 수 없을까?> 2편

싸움은 혼자 하는 게 아니야
영화 <결혼 이야기>.

English translation is here.

“너랑 결혼했던 날 생각하면 스스로가 낯설 정도야!”
“널 평생 알아야 한다니 끔찍해!”
“난 매일 눈뜰 때마다 네가 그냥 죽길 원해. 당신이 차에 치여 죽었으면 좋겠다고!”

안심해도 된다. 내가 강단에게 한 말은 아니고, 영화 <결혼 이야기> 속 대사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로 꼽는 작품인데, 그 안에서도 최애 장면이니 베스트 오브 베스트라 할 수 있다. 주인공인 찰리와 니콜은 양육권을 둘러싸고 이혼 소송을 진행 중이다. 변호인이 전달하는 서로에 대한 험담에 지친 니콜은 찰리와 직접 소통하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아가는데, 이야기는 예상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두 사람은 소송을 더 키우지 않고 평화롭게 해결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화가 진행될수록 숨어있던 화가 조금씩 고개를 쳐든다. 결국 '누가 누가 더 상처 주나' 대회가 된 상황. 폭발하는 감정에 지켜보는 나까지 숨이 막힐 정도로 마음이 괴로웠다.

물론 잔인한 감정싸움에 희열을 느끼는 변태 같은 이유로 이 장면을 가장 좋아하는 건 아니다. 울면서 바닥에 주저앉은 찰리는 니콜의 다리를 껴안고 말한다. “미안해.” 니콜은 찰리의 등을 쓸어주며 답한다. “나도 미안해.” 대화를 시작할 때는 작은 방 안에서도 멀찍이 거리를 두고 앉아있던 두 사람이, 싸움이 끝날 땐 방 한가운데 주저앉아 서로에게 기대고 있다. 싸움이 좁혀 준 두 사람의 거리. 너무 사랑해서 너무 증오하는 마음. 나는 두 사람이 헤어지지 않길 바랐다. 관계의 파탄이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인지, 이 영화의 제목이 <이혼 이야기>가 아닌 <결혼 이야기>인 이유를 이때 나는 이해했다.

의사소통의 문이 열려 있을 때 우리는 하지 못할 일이 없다. 그러므로 늘 최선을 다해서 그 문이 항상 열려 있게 해야 한다.
- 틱낫한, <화>

서로에게 기댄 후 아픈 마음을 꺼내 놓는 일. 두 사람에게 필요한 건 길고 뜨거운 싸움이 아니라 아주 짧은 이해의 순간이었다. 화내고 싸우기 전에 화해의 단계를 먼저 밟을 방법은 없는 걸까? 그럴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끔찍한 말을 할 필요도 들을 필요도 없을 텐데. 아니, 애초에 마음속에 화가 차곡차곡 쌓이거나 관계가 무너질 일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왜 격렬하게 화를 내고 나서야 서로를 가까스로 이해하게 될까.

화내는 방법이 맞지 않으면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게 된다. '뭔데? 꿍해있지 말고 말해봐!'라며 몰아세우는 바람에 더 화가 나기도 하고, 내가 화난 이유를 도무지 모르는 친구 때문에 욱하기도 한다. 상대가 소중한 사람일수록 그 화는 더욱 빠르게 증폭된다. '나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내 맘을 이렇게 몰라?' 한 명의 화는 곧 둘의 화가 되고, 둘의 화는 싸움으로 번진다.

그렇다고 화내는 방식이 잘 맞는 사람만 골라 사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족처럼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관계에서는 화라는 감정에 대응하는 태도를 서로 맞춰나가기 위해 더더욱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어디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화 잘 내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이렇게 말하면 상대방이 더 상처받는구나. 저 사람은 화가 나면 이렇게 반응하는구나. 내가 자리를 피했더니 싸움이 커지지는 않는구나. 틀리고 부딪히면서, 알아서 눈치껏. 이것이 내가 지금껏 화내는 방법을 터득한 기이한 방법이었다.

회사에서 업무에 이슈가 생기면 해결을 위해 회의한다. 하지만 화라는 감정을 다루는 게 중요한 문제라는데 공감하면서도, 이 문제를 논의 테이블 위에 바로 꺼내놓을 생각을 나는 하지 못했다. 그 결과 배우는 것보다 잃는 게 더 큰 수업이 이어졌다. 상대의 마음을 어림잡아 건넨 말이 화를 더 돋우거나, 화를 참기 위한 내 노력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며 씩씩대다가 오히려 마음속 화를 더 키우기도 했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는 사이 내 마음은 조금씩 너덜너덜해지고 있었다.

부딪히면서 배울 수 없고 눈치껏 터득하기도 어렵다면, 나에게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건 바로 직접 물어보는 것.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태에서 평화의 전략을 논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픈 사람보다 건강한 사람이 자기 죽음을 객관적으로 상상할 수 있듯, 강단과 사이가 좋은 지금이 '화'에 대해 대화하기 가장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가 좋은 날 기분을 망치거나, 다 끝난 싸움 이야기를 꺼내면 뒤끝 있어 보일까 봐 걱정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화로부터 지키는 일이 내 자존심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싸움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 화내고 싸우는 방법 역시 혼자 고민할 일이 아니다. '네가 화났을 때 내가 어떻게 해주면 도움이 될까?' '나는 화가 나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화가 났을 때도 내 마음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네 모습이 늘 고마웠어.' 화가 우리를 다시 한번 할퀴고 가기 전에 내 마음을 강단에게 직접 전하고 싶었다. 고민 끝에 나는 강단에게 <화해의 편지>를 쓰기로 했다. 내 노력이 싸움과 화해의 순서를 바꾸어주길 바라면서.

타인과의 평화를 원한다는 의지를 표현해야 한다. 타인의 도움을 요청하라.
- 틱낫한 <화>

💌 오늘 작은배 레터, 어땠나요?

지난주 보내드린 강단과 소신의 다툼 이야기. 보내기 직전까지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밖으로 꺼내기에 부끄러운 경험이었고, 너무 사적인 이야기는 아닐지 걱정됐거든요.

그런데 여러 구독자님께서 메일 답장으로 비슷한 경험을 들려주셨어요.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으며 전해주신 공감에 도리어 제가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심하게 욱하는 스스로를 볼 때마다 어딘가 고장난 사람 같다고 생각해 왔거든요.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구독자님들과 경험담을 나누면서 2편을 이어 쓸 힘을 얻었습니다.

오늘도 작은배 레터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글에 대한 피드백과 후기, 언제나 환영입니다! 가벼운 안부를 남겨 주셔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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