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
책은 늘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주었다.
*English translation is here.
어디 가서 독서가 취미라고 말한 적이 없다. 독서량은 적은 편인 데다 책 편식이 심하고, 많이 읽다가도 휴식기 갖기를 반복하다 보니 그렇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책과 나 사이에는 쉽게 끊이지 않는 묘한 연이 있다. 대학 시절엔 독립 서적 만들기 모임을 운영했고, 첫 직장은 도서관을 운영하는 출판사였고, 돌고 돌아 지금은 출판사까지 차렸다. 이쯤 되니 다시 생각하게 된다. 뭐야, 나 책 좋아했네.
그렇다면 생각의 방향을 다시 설정해 보자. 내가 책을 정말 좋아하는 거라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돌이켜보면 책은 늘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주었다. 그것도 100%의 확률로. 책을 매개로 만난 사람들은 언제나 다정했고, 머리가 복잡할 땐 책에서 찾은 좋은 문장 덕을 자주 봤다. 허무한 결말에 가볍게 실망하거나 중간에 책을 덮는 일은 있어도, 책을 거쳐 도착한 곳에 나쁜 것이 있던 적은 없었다. 조금도 밑질 필요 없이 언제나 본전 이상 얻을 수 있는 게임이라면,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책이 가진 마법의 힘 덕분이었을까. 이번에도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다 읽은 책 정거장]에 모였다. 독서 인구는 꾸준히 줄고 있다는데. 신기할 만큼 북적이는 이틀이었다. 15평 남짓 작은 공간에서 진행된 행사이지만, 어떤 손님들은 2시간이 넘도록 중고책 마켓과 전시를 공들여 둘러보았다. 심지어 이틀 연속으로 행사장을 찾은 분도 있었다. 기부받은 중고책으로 가득한 책장, 그리고 책을 좋아하는 다정한 사람들. 이번에도 어김없이 책은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주었다.
래리, 힌지, 일리와 신나게 행사를 준비하다가도 마음 한편에서 작은 의심이 떠오르곤 했다. 그냥 책도 아니고 중고 책인데, 이 행사를 좋아해 줄 사람이 있을까. 연말이 가장 바쁜 시기라는데 누가 굳이 여기까지 올까. 불안할 때마다 ‘결과보다 중요한 건 과정’이라 외쳤지만, 사실 그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말이었다. 하지만 행사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해서 결과가 과정보다 중요해지는 것은 아니다. 세 친구와 크게 웃고 서로를 격려하며 보낸 지난 2달간의 기억 덕분에, 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를 깨닫게 되었으니까.
힌지는 이번 행사를 통해 책이 더 좋아졌다고 말했고, 일리는 책을 직접 만들고 싶어졌다고 했고, 래리는 책에 대한 행사를 자주 열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책을 좋아한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게 됐다. 우리는 멀지 않은 날에 다시 모여 새로운 작당을 하기로 했다. 어느새 세 친구와의 약속은 내가 가장 기대하는 만남이 됐다.